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
12년 차 대기업 해외영업 업무를 해오면서 저는 수많은'실패'와 '좌절'을 겪어왔던 것 같습니다. '세계를 무대로 살고 싶다'라는 어쩌면 현실적이지 않을 것 같은 꿈 하나를 가지고 회사에 들어와 그 꿈을 가슴속에 지키며 하루하루의 직장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직장이라는 곳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주어진 일을 해야만 하고, 나의 가치와 목표보다는 회사가 창출하고자 하는 가치와 목표를 우선시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회사가 부여하는 일을 하며 상사, 동료, 후배와 조화로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하루를 잘 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런 곳에서 나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년 동안 힘들었던 나를 바로 세우고, 멈추지 않는 설국열차처럼 자가발전하며,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견디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꿈'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꿈'을 이루겠다... 사표를 던지고 싶을 때도 바로 여기가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다..라고 생각하며 흘러가는 시간에 나의 경험과 실력을 차곡차곡 쌓아왔던 것 같습니다.
'실패'와 '좌절'을 겪었을 때마다 저만의 극복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탓'인지 '남의 탓'인지 구분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인지 '바꿀 수 없는 것'인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대리가 된 지 얼마 안 지나서, 저는 사내에서 운영하는 '지역 전문가'에 지원하고 싶었습니다. 해외영업 직무이기도 하였고, 현지에 나가 언어/문화를 익히며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고 싶었습니다. 정성스럽게 지원서를 작성하여 팀장님께 의견을 전달하였습니다. 팀장님은 난색을 표하시며, '대리가 가기에는 직급이 너무 낮다'라고 하셨습니다. 저의 선배들도 사원 때 또는 대리일 때 간 적이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저는 항의(?) 아닌 항의를 했고 그제야 팀장님은 '이제까지 여직원을 지역 전문가에 보낸 적이 없다'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부 추천을 받아 인사팀에 전달되어야 하는데, 저의 지원서는 팀장님 선에서 조용히 컷 당하고 묻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분하고 억울하던지요. 일은 폭격기 수준으로 퍼부으시며 부려먹으 실 때는 언제고, 대외적으로 무엇을 할 때는 왜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도 구분하는 것인지, 팀 내에서 일도 제일 많이 하고 팀장님이 원하는 일을 척척해내는 '여자' '대리'인 저로서는 팀장님의 이런 이중적인 잣대가 소름이 끼치도록 얄미웠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해외영업에 여자가 별로 없는 상황이었고, 일은 곧잘 하지만 해외영업 전문가로 키우려는 본부 차원의 의지나 계획도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팀장의 이런 행동도 누구 하나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정말 '좌절'하였고 한동안 '분'이 안 풀려 팀장님과도 대면 대면하고 이런 보수적인 회사에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로열티도 동기부여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가족들, 친구들도 괘씸하다며 뭐 그런 사람이 있냐며 같이 열을 내주었고, 회사를 옮겨라, 팀을 바꾸라며 '행동'을 촉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남자 사람 친구' 한 명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너는 왜 네가 바꿀 수 없는 것 때문에 그렇게 너의 에너지를 낭비해? 네가 여자인 것은 바꿀 수 없는 거잖아. 그리고 뭐 딴 회사는 다른 줄 알아? 다른 회사 특히 우리나라 대기업은 아직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을 우대한다고.. 정도의 차이지.. 다 똑같아. 네가 다른 회사로 옮겼는데 똑같은 문제가 생기면 그때 또 옮길 거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지독히도 현실적으로 대꾸해준 이 '남사친'을 저는 지금도 참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여자'인 것은...'대한민국 기업의 수준(?)'은 내가 바꾸려고 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어찌 보면 참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처참한 기분이 들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 심지어는 대한민국 대기업 꼰대 부장님의 생각 또한 내가 엄청난 논리로 설득한다고 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여자 대통령도 탄생하고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로 급변할 때, 회사에서는 '여자 주재원'도 보내고 '여자 지역 전문가'도 보내는 등 인사 차원에서도 차별을 없애려는 정책으로 급 선회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차별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 예전을 생각하면 '강산이 바뀌었다'라고 말할 수준이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와신상담'했고 그 희망찬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곧 좋은 소식이 있겠지요.
해외영업은 소위 인기가 좋은 직군입니다. 많은 부서에서 오고 싶어 하는 부서지요. 다른 부서에서 오기 위해서는 팀 내에 빈자리 일명 '티오'가 있어야 하는데, 이 티오의 유무를 무시하고 저희 팀에 오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정기 인사발령 기간도 아니고, 사내 공모를 통해 충원 요청을 한 것도 아닌데 그냥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뜬금없이 팀 내로 발령받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아빠 나 해외영업하고 싶어' 말만 하면 인사팀에서 알아서 티오를 만들어주는 '빽이 짱짱한' 그야말로 '별'들입니다. 대기업에 있으면 '아빠'가 계열사 고위 임원이거나, 대한민국 고위 공무원이거나, 정치인이거나 하는 소위 은/금수저들이 아빠 빽을 등에 없고 별똥별처럼 떨어집니다. 이런 '별똥별' '낙하산'들이 발에 차이는 수준이 되다 보니,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내가 오히려 희귀한 화석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런 '별똥별'들은 대부분(다 그런 것은 아님) 고귀하게 성장해서 그런지, 해외영업의 뽀대 나는 것만 생각하고 와서 그런지, 일을 잘 못합니다. (안 하는 것이겠지요) 정말 해외영업은 잡다한 일도 많고 세세하게 챙길 것도 많은데, 이런 디테일에서 일단 차이가 나고 근본적으로는 동기부여가 다르지요. 일의 성과와 상관없이 이들이 승진에 있어서는 또 후진 없이 직진으로 잘 나갑니다. 오히려 저 같은 온갖 잡일은 다하며 실질적으로 성과를 내는 '개미'들이 또 승진에서는 누락을 하지요. 이런 친구들 덕에 저도 과장 승진에서 고베의 쓴 잔을 마셔야 했었습니다. 이 쯤되면 이 회사를 왜 다녀야 할지 의문이 들 정도이지요. 정말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학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회사 왜 다니냐고 얼른 박차고 나오라고 다들 그러실 겁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내 탓'인가 '남 탓'인가... 빽 없는 게 '내 탓'인가... 그건 내 탓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왜 사회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못 계신 걸까를 탓하는 것은 옳지 않잖아요.
이렇게 부모님 위치가 나의 위치로 결정되는 '국가의 사회적 수준'이 문제인 거지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지요. 내가 부모님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 것 아니잖아요.
저를 이렇게 '별똥별' 속에서도 제 힘으로 스스로 노력하며 '꿈'을 간직하며 열심히 살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 이 '낙하산'들은 제 밑에서 일을 배우며 일하고 있으니까요. (언제 저를 밟고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너 올라갈 동안 나는 노니?)
요즘 취업이 너무나도 어려워졌고, 특히 대기업은 공채 채용을 줄이고 수시 채용이라는 명목 하에 신입보다는 경력직을 많이 채용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들이 대기업에 들어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는 기회 자체가 우리 때와 다르게 많이 없어진 것 같아서 선배로서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소위 SKY가 아닌 학생들의 취업은 더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회사에 들어와 보니 정말 SKY가 많습니다. 물론 회사에 들어오면 학교를 따지지는 않습니다. 업무 성과와 태도가 중요하지요. 꼰대일수록 학벌을 많이 따지는 것 같습니다만, 학벌이 좋아도 일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학벌이 회사 내에서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례로 존경하는 한 선배님은 고졸 출신으로 회사에 들어와 회사를 다니시며 야간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지금은 팀장님이 되신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여자 부장님이신데, 인품도 훌륭하시고 업무 성과도 뛰어나 회사 전체의 우수직원으로 표창장도 받으셨습니다. 학벌이 안 좋아 좌절하는 분이 있으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좋은 학교를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까지 학벌이 결정짓는 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학벌이 좋은 친구들보다 본인의 능력을 키우고 증명하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SKY를 나오지 않았지만, 회사를 다니며 지적 욕구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야간 MBA를 다니며 주경야독을 했었습니다. 하루에 3~4시간 자면서 회사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더군요. 2년을 그렇게 극하게 살았더니 지금은 정말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철이 들고 나서 필요에 의해 공부를 하니, 너무나도 도움이 많이 되고 스스로 많이 성장한 것을 느낍니다. 제가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회사도 그렇게 판단해주더군요. MBA를 졸업하고 회사 내에서 이런저런 많은 성장의 기회가 덤으로 주어졌고, 그 기회를 활용해 평판이 좋아지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이 들면 지체 없이 방법을 찾고 실천하시면 좋겠습니다.
직장인의 삶은 꿈을 가질 수 없는 직업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꿈을 이루려면 운동가이거나 예술가이거나 전문직이거나 사장님이거나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장인은 조직 메커니즘을 통해서 내가 성장하고 더불어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지요. 직장 내에서 이루고 싶은 '꿈'을 설정하는 순간, 하루가 좀 더 소중해지고, 그 소중한 하루를 뜻깊게 채우기 위해 더 노력할 것입니다. 그 하루하루가 모여 당신이 '성장'할 것이고 '꿈'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좌절'과 '실패'를 겪는다면 냉철하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분석하여 나를 보호하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하며 성장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나. 아. 가. 겠. 습.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