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을 향한 사랑이 내게도 향하기 시작했다.
새롬이의 견생동안 가장 주요한 환경으로 본다면, 사람으로는 '나'였고 친구로는 9년 동안 함께 했던 '씩씩이'였다. 사람도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경험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형성한다고 한다. 새롬이도 나도 14년간 함께 하며 서로의 자아상에 영향을 미쳤을 테다. 나는 새롬이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받으며 사랑의 빚을 지었고 그 빚을 내어 사랑의 기쁨으로 일상을 채워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새롬이는 나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오늘 아침 출근 준비하며 선풍기 바람이 시원한지 꿀잠에 빠져 든 녀석이 귀여워 핸드폰 카메라에 담고 그 순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져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공기 중 함유된 산소로 우리가 편안히 호흡할 수 있음에도 공기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것처럼 새롬이도 내 삶을 지탱해 준 또 다른 공기였다. 공기 같은 새롬이는 14년간 내 삶의 기본값으로 세팅이 되어,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한 일상을 함께 수놓았다.
내게 반려견은 의미가 남다르다.
낯을 가리고 소심하고 다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사람들 속에 스스럼없이 섞이며 어울리기가 어려웠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외로움을 많이 느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친구를 찾거나 만나려 들지는 않았다. 외롭다고 말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두려움에 외로우면 외로운 채로 혼자 시간을 견뎌내는 것만이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런 내 곁에 변덕도 없이, 한결같이, 조건 없이 있어준 녀석들이 바로 강아지들이었다.
혼자였으면 힘들어서, 또 지루해서 엄두가 안 났을 산책도 녀석들과 함께라면 마치 보디가드 마냥 든든했고 신이 났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인간의 말을 못 해도 녀석들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언제나 나와 체온을 나누자고 먼저 다가와 주었다. 녀석들은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었고 나는 그 사랑을 기꺼이 받으며 삶의 끝까지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적당히 사랑을 흉내만 내며 살아왔던 나는 서서히 잔잔하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워갔다.
내가 반려견을 키우며 배운 사랑은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결심. 바로 책임감이었다.
사랑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의 무자비함이 만들어낸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애써 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어렵다.
느닷없이 예고도 없이 닥친 칼날을 품은 시간의 소용돌이가 불행의 터널로 나를 몰고 간다 해도 도망칠 지름길을 찾지 않는다. 때로는 통증에 압도되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두려움 속에서도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다.
그럼에도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결심!
녀석들에게 받은 사랑은 그 결심이 견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주었고 녀석들을 떠나보냄과 동시에 사랑의 과제를 완수하며 결심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고통의 한가운데 있다며 내 고통을 핑계로, 또 고통 속에 함께 머무르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핑계로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그 책임감의 무게를 성실히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내가 녀석들에게 한없이 받아 놓은 '사랑'때문이었다. 무턱대고 받기만 했던 사랑은 결국 빚으로 남아 이자까지 더해 사랑으로 되갚아 주어야 했다. 그렇게 주고받은 사랑은 때로 기뻤고 때로 이별 앞에 고통스러웠지만 결국 그 고통의 열매가 나를 성장으로 이끌어 주었다.
넘치는 사랑 속에 풍족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사랑의 위대한 힘을 체감할 기회가 많지 않다.
고통을 느껴본 사람만이 행복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듯이 사랑의 질식 상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고 인식한다. 진정한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경로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헌신적인 부모님을 통해서, 또 어떤 이는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를 통해, 또 어떤 이는 아낌없이 퍼주는 자연 속에서 사랑을 배울 수도 있다. 사랑을 배우게 될 대상은 이 외에도 다양하지만 내 경우는 대상이 반려견인 셈이다.
이제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 사랑을 남은 삶동안 얼마나 실천하며 살 수 있을지 장담 할 수 없지만 이제껏 배운 사랑을 토대로 또 다른 인생의 응용 문제를 풀 수 있는 기본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는 최소한 사랑을 할 줄 몰라서 못했다는 말은 영원한 핑계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내 삶에 소리없이 스며들어 내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랑을 깨닫게 해 준 내 강아지들.
언젠가 새롬이가 떠난다면 녀석이 내 삶에 펼쳐놓은 행복의 지분도 함께 가져감으로써 엄청난 상실감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 상실감은 내가 받은 사랑의 대가이다. 하나를 얻었으면 하나를 내놓아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내가 견뎌내야 할 삶의 몫이다.
이제는 노견이 되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잠만 자는 새롬이에게 엄마와 함께 했던 14년 견생은 과연 행복했을까 궁금하다.
이 질문은 요새 나 자신에게도 수시로 던진다.
사랑의 정의를 내리고 사랑의 방법을 깨닫게 된 후 나에게 온 가장 큰 변화는 서툴지만 이제야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생 중반에 진입하며 그동안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애쓰며 살았는지 되묻는다. 아직 나는 내 행복을 위해 사랑의 결심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이제는 남의 기대에 부응하려, 나를 깔보며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나 보란 듯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분노의 감정에 기대어 살지 않을 생각이다.
이것이 녀석들이 떠나며 내게 숙제로 남겨준 과제이다.
나는 매일 나에게 묻는다.
너는 언제 가장 행복하니?
네가 가장 행복해하는 그것을 내가 너에게 해줄게, 언제든 말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