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두 녀석을 키울 때는 산책할 때 두배로 힘들었지만, 두 녀석이 가진 존재의 매력이 달랐기에 기쁨도 두 배였다.
새롬이는 진득한 모양새가 흡사 양반가 자제다운 면모가 있어 희로애락에 춤을 추듯 널뛰던 내 마음에 중용의 덕을 일깨워 주며 한결같은 해맑음으로 기복 없이 푹신한 쿠션 역할을 해주었고, 씩씩이는 새롬이와 달리 질투도 욕심도 많고 눈치도 백 단이어서 고양이에게나 보일 법한 치명적인 마력을 가진 정말 사랑스러운 녀석이었다.
퇴근 후 녹초가 되어 집에 와도 내내 잠만 자다 인기척에 오도방정 떠는게 뻔함에도 오매불망 엄마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겨주는 녀석들을 보며 나 역시 백년손님 맞아주듯 격하게 반응해주다 보면 없던 힘도 솟아나곤 했다.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 부모에게도 받아보지 못했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반려견 두 녀석에게 무차별적으로 받았다. 분리수거를 위해 잠시만 나갔다 들어와도 10년 만에 만난 것 마냥 반겨주니 사람이었다면 정말 몸 둘 바를 몰았을 테고 이런 영광과 호사가 또 있을까 싶었다.
이렇게 두배로 기쁨을 주었던 녀석 중 한 녀석은 9년 만에 떠나고, 한 녀석은 노견이 되어 몸이 아프니 녀석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긴 세월을 증명하듯 후폭풍도 거세다.
씩씩이가 떠나고 내 마음은 가끔씩 우울하고 허전하고 아프다. 잠시 잊은 듯 일상을 살아가다가 갑자기 부지불식간 깊은 상실감과 슬픔에 압도되는 날이 있다.
특히 주말에 잘 쉬고 출근한 월요일이면 월요병과 맞물린탓인지 더 지독한 펫로스 증후군이 찾아온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멀리 이사를 가도 한동안 허전함에 기슴 시릴 텐데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놀고, 함께 운동까지 다니던 영혼의 소울메이트 같았던 녀석이 떠났는데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펫로스 증후군이란 진단명이 별도로 만들어진 이유도 나와 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일 것이다. 씩씩이가 살아있는 동안 내게 주었던 기쁨만큼의 상실감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오로지 내 몫이다.
사랑할 때는 떠난 후의 고통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함 이 정도로 힘들 줄 몰랐고 녀석을 처음 입양했을 때도 이 정도로 녀석을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챙겨주어야 했던 내리사랑의 결정판인 반려견을 떠나보낸다는 건 그동안 내 안에 크게 자리했던 사랑의 공간, 기쁨의 공간이 갑자기 텅 비어버리는 상실감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 빈 공간을 다른 무엇으로 채운다 해도 생명체가 자리했던 공간인지라 그 온기까지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시간이 망각이라는 은혜를 베풀어 주길, 고통이 성장이라는 열매를 맺어주길, 또 그점을 위안 삼으며 이 시간을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또 반려견과 나누었던 사랑이 내 삶의 도화지를 다채롭게 채색해 준 소중한 경험이었음을 알기에 견뎌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씩씩이는 방광암 투병기간 내내 소변 저장 능력을 상실해 기저귀를 상시 착용했었다.
기저귀가 떨어질까 조바심 내는 게 싫어 한번 살 때 대용량으로 구입해 놓은 지라 녀석이 떠나고도 사용하지 못한 새 제품의 기저귀가 잔뜩 쌓여있었다. 씩씩이의 변한 신체적 상황에 꼭 필요했던 기저귀였지만, 역으로 암만 아니었음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기저귀였기에 씩씩이가 떠나버리자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그렇게 기저귀를 당장 갖다 버리고 싶었지만 마음 한편에 이 다음 새롬이가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베란다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어제 베란다 창고에 넣어 둔 물건을 사용할 일이 있어 아주 오랜만에 창고를 열어 보았다가, 맨 앞줄에 놓인 씩씩이 기저귀가 눈에 들어왔다. 기저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씩씩이가 떠나기 무섭게 기저귀부터 치워버렸는지 모르겠다.
또 지독한 암으로 식욕을 덮어버린 탓에 곡기를 끊어 맛도 보지 못한 채 대량 남아 버린 각양각색 간식도 씩씩이가 떠나고 얼마지나지 않아 반 정도는 대형견을 키우는 지인분께 나눔해 드렸다. 그러고도 남은 간식은 새롬이 몫으로 남겨 두었는데 이제는 새롬이가 남은 간식을 모두 먹어간다.
새롬이는 씩씩이가 떠나고 난 후 보기에는 편안해 보이지만 입 주변 털 색깔이 흰색이던 것에서 갈색으로 많이 변해버렸다. 털 색깔의 변화가 노화의 징후겠지만 한편으론 씩씩이가 떠난 것에 스트레스를 받은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어쩌면 새롬이의 눈이 안 보이는 게 씩씩이의 부재를 확인할 수 없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언제쯤 이 깊은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사랑한 만큼, 함께 한 시간만큼 아파야 한다면 무뎌질때까지 충분히 아파하는 수밖에 없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