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이 아닌 불편으로 설계된 한국의 통신 UX
070-4499-42xx.
아침에 커피를 내리려는데 070으로 시작하는 전화가 울린다.
회의 중, 점심 식사를 할 때, 타이밍을 가리지 않고 온다.
받지 않아도 안다. 대출, 보험, 카드사 광고, 아니면 검찰청을 사칭하는 이야기.
신호음이 울릴 때마다 070 번호를 보면, 맥이 빠진다.
스팸 차단 앱을 깔아봤다. 다음 날 또 다른 번호로 온다.
차단 목록만 늘고,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문득 궁금했다. 왜 하필 070일까?
070은 인터넷전화, 정확히는 VoIP(Voice over Internet Protocol)용 번호대다.
쉽게 말하면, 전화선 대신 인터넷으로 통화가 되는 구조다.
인터넷으로 통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회선 설치도, 유지비도 저렴하다.
문제는, 070 번호가 쉽게, 저렴하게 발급된다는 점이다.
일부 서비스형 앱 기준으로는 월 2~5천 원 수준에서 번호를 개통할 수 있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하루 이내 사용이 가능하다는 안내가 있다.
덕분에 콜센터나 중소상공인뿐 아니라 개인 사용자도 별다른 절차 없이 인터넷 전화망을 확보할 수 있다.
(물론 정식 통신 사업자로 등록하려면 별도 요건과 비용이 든다.)
앱 기반 서비스는 그런 절차를 우회한다.
결국 '통신망 개통'이라는 진입장벽이,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2024년 12월 기준 천만 개 안팎의 회선이 전국에 깔려 있고, 그중 많은 번호가 070으로 시작한다.
070 번호를 운영하는 사업자는 통신 3사만이 아니다.
정부에 등록된 부가·별정 통신사업자는 수백 곳에 이르며, 매년 신규 등록이 늘고 있다.
(공공데이터 기준으로는 천 개 안팎의 사업자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사업자 중 일부는 회선을 재판매하거나 단기간 임대하는 구조도 포함돼 있다.
실명 인증이 느슨한 경우도 있어, 실제 발신자를 즉시 식별하기 어렵다.
몇 만 원이면 새 전화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를 차단하면, 내일은 또 다른 번호가 온다.
번호는 무한대지만, 내 시간은 유한하다. 이 게임에서 지는 쪽은 언제나 사용자다.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070 전화를 받게 되는 경로가 완전 무작위는 아니다.
이미 그 이전에 '동의'라는 이름으로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카드사나 통신사 가입 화면을 떠올려보자.
'마케팅 수신 동의'를 해제하려면 자세히 읽고, 몇 번을 눌러야 한다.
하지만 '전체 동의' 버튼은 한 번이면 된다.
이는 편의 기능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사용자의 선택을 유도하는 설계다.
그렇게 모인 정보는 제휴사를 거쳐 070 회선 콜센터로 전달되고,
결국 사용자는 '동의한 적 없는 전화'를 받게 된다.
합법과 불쾌함의 경계가, UX 한 줄로 결정되는 셈이다.
그놈의 치아보험;;
국내에서 070 스팸이 늘어나는 건 체감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조사 자료에서도 국민 1인당 월평균 1.53회씩 받는다고 나온다.
같은 시기 미국은 월평균 14건, 전화 사기 피해액만 연간 8억 5천만 달러였다.
문제가 커지자,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2020년부터 모든 통신사에 'STIR/SHAKEN'이라는 발신자 인증 체계를 의무화했다.
원리는 단순하다. 전화에도 신분증을 붙인다는 개념이다.
전화가 걸려올 때 통신망에서, 진짜 등록된 발신자의 번호인지 자동으로 확인한다.
은행이 본인 확인을 하듯, 통신망이 발신자의 신원을 증명하는 구조다.
인증체계를 통해 발신번호를 검증할 수 있게 되었고,
관련 보고서에서는 번호 위조·자동발신 스팸이 유의미하게 감소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국내 통신망 환경은 쉽지 않다.
유선·무선·인터넷전화 망이 뒤섞여 있고, 070 번호 운영 사업자의 수도 나날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비용 부담과 책임 소재의 복잡성도 남아 있어 '어디부터 손을 보느냐’는 논의에서 멈춰 있다.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구조다.
미국은 통신망 안에서 문제를 풀었고, 한국은 사용자 단말에서 불편으로 때운다.
지금의 시스템은 사용자가 직접 의심하고, 차단하고, 신고하면서 유지된다.
언제까지 개인의 판단에 맡길 것인가.
발신이 확인되고, 책임이 추적되는 구조여야 하지 않을까?
070 스팸은 단속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지금처럼 스팸 대응이 금융 쪽에만 집중되면, 사용자 불편이라는 부작용만 발생한다.
정부는 발신자 인증제 도입, 070 회선 단속, 금융–통신 공동대응 등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사용자가 체감할 만한 변화는 거의 없다.
제도는 있는데,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필요한 건 '받은 후 대응'이 아니라 '받기 전 판단'이다.
예를 들어, 전화가 오기 전에 어떤 사업자 망에서 온 번호인지 표시하거나,
인증된 번호엔 파란 라벨을, 미인증 번호엔 회색 라벨을 붙이는 식이다.
각 서비스에 흩어진 마케팅 동의를 한 화면에서 관리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처럼 받고 나서 차단하는 방식은 임시방편이다.
새 번호는 언제든 생긴다. 진짜 개선은, 사용자가 안심할 수 있는 쉽고 간단한 정보에서부터 시작된다.
---
사실 070 번호는 표면적인 이유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매일 의심하며 살아야 하는 피로를 느낀다는 것이다.
피로를 줄이는 건 사람이 아니라, 기술이어야 하지 않을까.
『일상의 UX 실험실』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하고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사람과 제품, 시스템이 만드는 ‘좋은 경험’을 다각도로 탐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