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가 제일 센 거였어?

by Slowlifer

오 개월이 걸렸다.


저녁 약속을 잡고 집밖으로 나가는 일, 그리고 다시 회사 동료들을 웃으며 볼 수 있게 되는 데 걸린 시간.


내가 좋아하는 식물들을 종이가방에 소중히 담아 한 손 가득 들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오랜만이라 설레기도 하고, 나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은 것에 미안하기도 하고, 다시 또 내 마음이 그때로 돌아가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나는 늘 회사 동료들과 사이가 좋았다.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천성이 사람을 좋아하기에 쉽게 사람들과 친해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하지 않기에.


그러던 내가 돌연 병가를 내고 잠적 아닌 잠적을 한지 오 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어제 나는 회사 동료들과 찐한 저녁 식사를 했다.


몇 번이고 내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그 연락으로 다시 괜한 아픔이 되살아날까 망설이고 자제했다는 동료들. 신년회가, 따뜻해지면 보자던 약속이, 결국은 미뤄지고 미뤄져 세상이 온통 푸르름으로 바뀐 여름의 문턱에서야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요청으로, 그리고 그들의 배려로 ‘그 사람’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기로 서로 노력하며 우리는 그동안의 밀린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새 나는 사람들 속에서 다시 사람들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다시 자연스럽게 섞여 웃고 떠들고 있자니 마치 나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실은 치열했던 5개월간의 남모르는 노력이 있었기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데, 이젠 혼자 지고 있던 그 무겁던 시간들이 제법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끼리 늘 우리가 하던 우리만의 대화를 나눴다. 늘 장난처럼 돌아가며 누가 누가 더 센 사람이냐가 화두가 되었었는데 어제 결론이 났다고 했다.


내가 제일 세단다.


그걸 다 버리고 가버린 내가 결국은 제일 센 사람이란다. 손에 쥔 걸 내려놓는 게 진짜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걸 그냥 한방에 놓고 가버리는 게 능력자란다. 다 그 용기를 내지 못해서 그렇게 버티는 건데 그 용기가 대단하단다.


농담으로 그래 내가 그렇게 툭 버린 게 대체 얼마 짜린 줄 아냐며 한껏 오버하며 한술 더 떴지만 속으론 그 말을 한번 더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랬다.

정말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지금은 마치 원래 없던 것인 듯 이미 아련하게 느껴지지만 내 소중한 커리어를 내려놓는 일, 따박따박 입금되는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월급, 무리에 섞여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내는 회사원으로서의 내 페르소나, 친구 같은 동료들.


뒤돌아보니 참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다. 내 자신이 기특했다. 오직 나를 위해 그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줄 알았던 내가 얼마나 용기가 있었던 것인지, 나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해져서 도망을 쳤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한 강한 마음을 가졌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던 거다.


많은 걸 내려놓았어도 삶은 흘러가고 그 사이 나는 내 인생의 방향키를 완전히 내 손에 쥘 수 있었다.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적어도 한 획으로 남을 이 가치 있는 시간을 손에 움켜쥐고 있던 많은 걸 내려놓고서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어제의 만남으로 나는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충분히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되찾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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