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장녀’ 라는 신조어가 번지기 시작할 때, 예상컨대 나와 같은 대한민국 대부분 장녀들은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아 이건 나 같은 사람을 칭하는 말이구나’ 혹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내 안의 이상한 책임감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구나’
별거에 다 K를 갖다 붙이네 싶기도 했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를 그 단어가 다 이야기했다.
결혼 전 당시 예비 시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돌아온 날 나에 대한 시댁 어른들의 첫인상 평가는 이랬다.
“형 여자친구는 막내라서 그런지 철부지 막내끼가 느껴지는데, 걔는 장녀 같은 느낌이 있더라”라고 하셨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거 칭찬이야?’
적어도 나쁜 의미로 이야기하신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어딘가 마음이 찜찜했다.
나도 해맑고,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철없는 막내딸 같은 이미지이고 싶은데 딱 봐도 장녀 같단다.
한국에서의 장녀의 이미지는 대부분 그러하다.
부모님 속 안 썩이려 말 잘 듣고, 응석 부리지 않고, 동생 잘 돌봐주고 양보하며, 말 안 해도 부모님 마음 다 이해하는 속 깊은 그런 참한 딸.
장녀라고 모두가 이런 건 아니겠지만 난 이런 문화가 싫다.
그래서 나는 내 딸이 이담에 커서 어디 가서 ‘K장녀’ 소리는 절대 듣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 딸이 아이같이 한 없이 해맑을 수 있을 때까지 해맑고, 어딜 가나 사랑 듬뿍 받은 사랑둥이 티가 뿜뿜 났으면 좋겠고,
부모에게는 응석 부릴 수 있는 건 얼마든지 응석 부리면서 그렇게 자기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내가 K 장녀의 표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늘 책임감이라는 단어에 억눌려 살았다.
책임감이라 쓰고 부담감이라 읽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렇게, 무엇을 그렇게도 나는 내가 알아서, 내가 나서서, 내가 먼저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늘 내 안에는 특히 가족에 대한 부담감이 가득하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대놓고 등 떠밀지도 않았는데 늘 내 안에는 모든 걸 내가 앞장서서 책임져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존재한다.
왜 나는 부모에게 한 없이 철없는 그런 딸이 되지 못했을까.
왜 여전히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말 한마디 못하는 어른으로 자랐을까.
왜 내 감정보다 내 감정을 드러냈을 때 괴로워할 부모님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내 마음은 자꾸 뒤로 뒤로 자꾸만 숨겨야 했을까.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젠가부터 왜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 내 가족에겐 당연하게 되었을까.
왜 나는 씩씩한 아이, 알아서 잘하는 아이, 책임감 강한 아이, 어른스러운 아이로 클 수밖에 없었을까.
그 무거운 책임감을 지면서 까지 내가 지키려고 했던 건 무엇일까.
모든 건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건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른스러운 아이를 칭찬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늘 반대로 이야기한다.
아이는 아이답게 커야 한다고.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 되는 거 아니라고. 어른다운 어른도 몇 없는 세상에 왜 아이들에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하느냐고.
아이는 어른스러울 의무가 없다고. 아이는 아이스럽게, 어른은 어른스럽게 그렇게 살자고.
할 수 있을 때 부모님께 징징거리고, 응석도 부리고, 떼도 쓰고 억지도 써보고, 할 거 다 해야 건강한 사람으로 큰다고.
아프고 나서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서야 알게 된 불편한 진실.
내가 K장녀가 된 건, 어릴 적 내 부모님이 어른의 역할을 충분히 못해줬기 때문이라는 것.
이제 와서 부모님 탓을 하고 원망하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내게 이건 진실이라는 것이다.
부모가 어른으로서 감내하고 해내야만 하는 일들을 하지 않았을 때
그 부모 아래에서 큰 아이들은 그러기 않아도 될 시기에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다. 아니, 어른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부모가 해주지 않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한다.
그렇게 원치 않게 애어른이 된 아이는 자라서 그때 내가 충분히 아이 답지 못했던 것을 슬퍼한다.
그 아이가 서른일곱의 지금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