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어느 날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어른의 무게’를 나는 알지 못했다.
좋은 학벌, 번듯하고 안정된 직장, 좋은 집과 차. 겉보기엔 부족한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대체 왜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에 걸리는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손에 쥔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여 끙끙대다 끝끝내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내가 모르는 뭔가 힘든 점이 있겠지’ 생각하며 이해해 보려 노력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으로는 여전히 삐딱한 시선으로 ‘그저 내려놓으면 될 일 아닌가. 뭐가 그렇게 어려울까, 결국 단 하나도 잃기 싫은 욕심 때문이지.’ 생각하며 남의 인생을 내 멋대로 쉽게 판단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마음이 많이 지쳐가던 어느 날, 출근길 셔틀버스 안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 있는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올라오더니 이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조차 당황스러운 마음을 채 진정시키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출근은 해야 했다. 마음이 아픈 건 그렇게 숨겨질 수 있는 일이니까. 남에게도,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갑자기 가슴이 조여 오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게 능력인 줄 알았던 그때의 어리석은 나는 몸이 주는 최후의 경고를 받아 들고서도 꾸역꾸역 몇 시간을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버티다 결국 "몸이 좀 안 좋아서 조퇴 좀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증상은 시작에 불과했다. 증상이 시작된 후로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더 이상 나는 나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극도의 불안감이 나를 순식간에 집어삼켰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의 병에 걸렸다.
그때의 나는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고장 난 내 마음은 이제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고장 난 마음으로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를 끌고 회사라는 숨 막히는 곳에 내 몸뚱이를 끌어다 놓기를 반복하던 그때, 살면서 처음 겪는 깊은 무력감에 바닥을 찍고서도 어느새 양손 가득 쥔것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는 나를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 역시 손에 쥔 것을 쉽게 놓지 못하는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 중 하나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는 걸.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던 ‘어른의 무게’였다는 걸.
삼십 대 후반이 다 되어 가도록 나는 나를 알지 못했다. 아니, 내가 알고 있던 나는 그저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었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보이는 나'가 중요했고, 그게 곧 나인줄 알았던 시간들이기에 늘 남에게 밝고 씩씩하고, 남이 요청하는 일은 어떤 일이든 거절하지 않고 뭐든 척척 잘 해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는 것을.
직장인으로서, 장녀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어느새 내 어깨엔 말없이 쌓인 의무와 압박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12년 차 인정받는 전문직 라이선스를 가진 외국계 대기업 직장인이었고, 평생 부모님 속 한번 썩이지 않은 착하고 자랑스러운 딸이었으며, 내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갓 두 돌이 지난 아기의 엄마이자, 지금처럼 차곡차곡 우리의 미래를 함께 쌓아 올리길 기대하며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남자의 아내였다.
그 많은 나를 뒤로한 채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렸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인터넷에 내 증상을 검색해 보니 ‘번아웃’이라고 했다.
“내가 번아웃이라니, 일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는데. 왜?” 하지만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일이 많아서 번아웃이 온 것이 아니다. 정확히 내 증상은 '관계에서의 번아웃'이었다. 사람 좋아하는 나는 순진하게도 사회생활을 12년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내 맘 같을 거라는 큰 착각을 하며 살아왔다. 운이 좋게도 여태까지 잘만 통해왔던, 그래서 그 누구보다 어딜 가더라도 금방 적응해내는 게 나의 최고 장점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런 내가 '적응장애' 판정을 받았다. 웃음이 나왔다. '있는 그대로의 나'도, '그 사람에게 모두 맞춰진 나'도,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마치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애초부터 타인의 기준은 내가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나는 나의 한계치를 알지 못하고 부단히 도 노력했다. 나를 바꿔가며 모든 것들을 그 사람에게 맞춰가며 그 사람의 기분을 살피고 말투 하나, 표정 하나, 미묘한 변화들을 살피고 또 살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음이 멍이 들기 시작하자 여기저기 몸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두통으로 시작하더니, 자주 배가 아팠고, 피부는 거칠어지다 못해 낯빛이 어두워지고, 결국엔 숨이 쉬어지지 않는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나의 행동 전부를 타인의 기준에 내맡긴 결과, 나는 그 사람이 돌려보낼 예상된 비난과 비판이 무서워 하루 종일 랩탑 앞에서 이메일을 하나 발송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상태가 되어서야 병가를 냈다.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예요, 병가 좀 내겠습니다."
그간 힘겹게 손에 거며 진 것들이 아무리 아까워도 살고 봐야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자랑이었던 나의 소중한 12년의 커리어를 멈추기로 결심했다.
살아야 했으니까.
살기 위해서는 숨을 제대로 쉬어야 했다.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온 나는 꼬박 3주를 밤낮없이 두꺼운 암막커튼이 쳐진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누워 보냈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할 때는 좀비처럼 몸을 일으켜 세워 의무적으로 그 일들을 처리 한 뒤 다시 나의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마음이 이미 너무 많이 닳고 닳아 바닥까지 소진되어 아슬아슬한 그 상태의 나는 그저 나를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렇게 나는 전에 없던 깊은 우울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세상에 낙인찍힐까 두려웠고, 혼자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마음이 불안할수록 웅크렸고 웅크릴수록 두려웠던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이대로 세상에서 내가 영영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끝이 없는 어둠으로 혼자서 자꾸만 자꾸만 걸어 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무력하게 쳐다보며 누워 있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이었을까, 마냥 웅크릴 수만은 없었다. 나는 엄마였기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정신이 건강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의 불안을 먹고 자란 나는 불안이 심한 어른으로 자랐다. 불안이 주는 불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너무 잘 아는 나는 이 불안과 우울을 내 아이에게 대물림할 수 없었다. 아니 절대 그래서는 안되었다. 아이에게 나의 불안이 옮겨가는 것이 나의 깊은 우울감보다 훨씬 더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이중생활을 했다. 아이가 내 옆에 있는 동안엔 최대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내야 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며 눈을 맞춰야 했다. 나는 안 괜찮았지만 엄마인 나는 괜찮아야 했다. 나는 내가 원해서 아이를 갖기로 선택했지만 아이는 이런 내가 엄마이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그 아이의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놓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책임감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최소한의 책임감을 부여잡고 멈춰 서 있었다.
그렇게 멈춰버린 나의 시간에 ‘갭이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게 된 건, 3주라는 시간이 흘러 내가 겨우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었을 때부터였다. 항상 무언가를 성취하며 살아온 성취중독인 내가 커리어를 멈추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엔 여전히 놓지 못한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냥 돌아갈까?’, ‘그럴 거면 왜 그만뒀겠어.’ 내 안에서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잡음을 내며 나를 괴롭혀댔다.
전문직 타이틀, 대기업, 억대 연봉.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나를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 역시 그것들에게서 나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있는 속물일 뿐이었는데. 나 역시 아주 많이 그런 것들을 연연하는 보통 사람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억울하고 또 분했다. 내가 어떻게 쌓아온 커리어인데, 고작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걸 내려놓다니. 생각만 해도 속이 쓰렸다.
하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던 그날을 기억하며 다시 생각했다.
“정말, 그 모든 게 나를 잃으면서까지 지켜낼 가치가 있는 걸까?” 답은 명확했다. 그래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들이라고 여기면 될 거라 믿으며 모두 놓아 버리기로 했다.
회피라도 괜찮았다. 우선은 잃어버린 호흡부터 되찾아야 했다. 해본 적 없어 모든 게 쉽진 않았지만, 나는 서서히 쉬는 법을 배워갔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때에 해보며, 조금씩 나의 삶에 다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새, 내 곁엔 나를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식물, 요가, 명상, 글쓰기, 수영, 식물, 프리다이빙, 텃밭. 글로 모아두고 보니, 그 모든 것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나의 호흡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제대로 숨을 쉬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렇게 멈춰 선 그 자리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되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60X180의 작은 요가 매트 위에서, 나의 1평짜리 작은 베란다 정원을 통해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고 고요한 물속에서, 새하얀 백지위에 적어 나가는 나의 일상과 생각들을 마주하면서, 10평짜리 텃밭에서 웅크리고 앉아 흙을 만지면서, 나는 매일 조금씩 나의 호흡을 찾아오는 연습 했다.
그건 단지 '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방치 해뒀던, 나조차 잘 알지 못했던 나를 이해하는 시간, 나와 친해지는 시간, 나의 삶의 방향을 다시 그려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책은 불안의 끝에서 새로운 나를 찾아 나가는 여정의 기록이자, 나와 같이 숨이 막혔던 경험이 있는 누군가가 다시 숨을 쉴 수 있도록 건네는 작은 호흡법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가 언젠가의 나처럼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에게 잠시 숨 고르기를 허락하는 작은 쉼표가 될 수 있기를, ‘한 번쯤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줘도 괜찮아 ‘하는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자신만의 호흡을 되찾아 진정한 '나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