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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1부] 어느 날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by Slowlifer

남들이 말하는 대로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지 돈 버는 일이 어디 쉽나,라고 반쯤 체념하며 좀비처럼 회사생활을 근근이 이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아닌 나로 살던 그때의 나는 농담인 듯 자주 이야기 하고 다녔다. 나는 지금 마치 팔, 다리를 다 잘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기분이라고.


하지만 누구보다 그게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분명 내가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무엇인가 툭, 풀려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내 마음속에는 '이건 내가 아니야'라는 목소리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 후 내 마음속에서는 같은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조금 더 빈번하게, 조금 더 단호한 말투로. '이건 내가 아니야'.


지금은 안다.


그 목소리는 이제 더는 '내가 아닌 나'인 채로 살아갈 수 없다고 내 몸과 마음이 보내온 신호이자 마지막 경고였다는 것을. 썩은 지 오래라 진작 끊어냈어야 했던 내게 아무리 도움이 되지 않는 그 끈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툭 끊겨 나갔을 뿐이라는 걸. 그건 결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30년이 넘도록 내가 나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이게 내가 아니라니? 그럼 난 어디에 있는 건데?

너무나 당황스러웠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나 지쳐있어 꽤나 단호하고 힘 있던 내 안의 그 목소리를 따라갈 조금의 에너지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였다. '아, 이대로 더는 안 되겠구나'.


나는 그제야 기수의 채찍질에 못 이겨 앞만 보고 이유도 모른 채 냅다 달리던 경주마처럼, 그저 주인의 예쁨을 받으려던 한 마리의 말처럼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한치의 틈도 나에게 허용하지 않고 힘껏 달리던 나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아니, 사실 멈추는 것 외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두컴컴한 방 안에 누워서 멍하게 있다 이따금씩 소리 없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대는 것 밖에. 맘껏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할 만큼 많이 상해버린 내 마음이 가엾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안의 그 목소리는 어서 나를 찾아오라고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내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줄 때까지 그 자리에서 그저 가만히 나를 기다려줬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충분히 울고 충분히 아파하라고. 그리고 힘이 생기면 그때 날 찾아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꼬박 3주라는 시간 동안 웅크리고 울기만 하던 내가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그때, 나는 자연스럽게, 그 어떤 힘도 들이지 않고 그 목소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씩, 딱 그만큼만 나를 움직여 낼 수 있었다. 그저 지금까지 내가 알던 나는 내가 아니었다는 것뿐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들리지 않은 내 마음의 소리 덕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 안의 내가 나에게 해주는 다정하고도 따뜻한 그 목소리.


하루아침에 나를 잃은 느낌은 마치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갯속에 갇혀 있는 자동차와 같았다. 운전을 하다 안갯속에 삼켜져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갑자기 확 줄어든다. 그저 속도를 최대한 줄이고, 비상 깜빡이를 켜고, 시야에 없지만 앞에 있을 다른 차와 부딪히지 않게 천천히 천천히 움직여 내야만 한다. 멈출 수도, 속도를 낼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안개가 걷히길 바라며 단지 지금 내 시야가 허락해 주는 곳, 딱 그곳 까지만 보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이 쪽으로는 갈 수 없다는 표지판이 세워진 막다른 길에 다다라서야 멈춰 선 나는, 그제야 나 자신을, 그리고 나의 주변을 조금씩 둘러볼 수 있었다. 지금껏 항상 그게 최선이라 믿으며 열심히도 살았던 너무나 당연했던 내가 낯설어진 그 순간, 나는 찾아내야만 했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지금 나는 왜 여기에 서 있는지.


이 모든 게 우연의 연속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내가 걸어온 길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계획하고 목표를 세웠지만 결국 대부분 나의 손에 쥐어진 것들은 우연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해버리면 그간의 내 노력들이 다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표창이라도 되는 듯 손에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멈춰서 보니 피가 흥건한 내 두 손이

보였고, 그 안에 놓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문직 자격증, 대기업, 고액 연봉.


그래서 뭐? 그게 왜?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을 한심해하던 과거의 내가 스쳐 지나간다. 지금 내가 그들과 뭐가 다르단 것인가. 나를 잃으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들이 고작 일뿐이었단 말인가.


그랬다. 누구보다 열심히였다.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 한 번쯤 생각했을 법도 싶은데 그조차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저 나의 인생은 '열심히' 말고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뒤처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비교 대상도 없었다. 그저 어떤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끝없는 경쟁을 시작했다. 내게 세상은 끝없는 퀘스트로 가득 찬 전쟁터였다. 세상이 정해놓은 평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전쟁터에서 승리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부단히 도 애썼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가혹하게도 방치했던 나 자신을 있는 힘껏 다해 끌어안아야 했다. 너무 힘에 부쳐 털썩 주저앉아 버린 나를 어르고 달래어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나를 알지 못했기에 내가 어떻게 하면 다시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내 안의 다정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그렇게 멈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너만 생각해도 괜찮아'.


인생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는 우연의 연속인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나를 놓아주자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우연들이 쌓여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들었듯, 또다시 새로운 우연들이 나를 끌어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와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세상이 말하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좋은 삶 말고, 내가 말하는, 내가 원하는 좋은 삶을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눈에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 아니, 어쩌면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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