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의 나라
2차 세계 전쟁 당시 루돌프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를 담당했던 장교였다. 그의 숙제는 효율적인 유대인 학살이었고, 그는 아주 능력이 뛰어난 군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신분세탁을 하며 도망치다가 결국 잡혀 이스라엘 예루살렘 법정에 섰다. 법정에 선 그는 자신이 무죄라고 했다. 자신은 “단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것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간 이유였다. 군인은 오로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가담했던 박 중령도 똑같은 대답을 한다. 대통령 시해를 알았지만 자신은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고 했다. 다시 그 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전방 근무지, 낡은 관공서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보냈던 시간이 그립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 자신과 가족과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고 했다.
영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1979년 12월12일 전두환의 쿠데타 사이에 벌어진 대통령 시해범들에 대한 재판을 다룬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중심으로 그의 심복이었던 박 중령 외 7명이 함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군인이었던 박 중령을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그는 명령에 충실한 군인인가, 내란에 가담한 죄인인가를 두고 법리 싸움이 벌어진다.
박중령을 대변하는 변호사는 그에게 내란을 도모할 동기가 없었고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는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 그들 모두를 내란죄로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했다. 결국 박 중령에 대한 내란죄 여부의 판단은 법리에 있지 않았다. 그저 권력에 있었다. 만약, 12.12 군사반란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여론에 의해 시해범은 혁명가로 불리었을 수도 있다.
영화는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묻지 않는다. 다만, 10.26, 대통령 시해에 가담한 한 명의 군인을 중심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주변인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그 역사의 중심에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과연 박 중령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는가.
그 답은 아마도 아이히만에 있을 것이다. 아이히만은 결국 사형된다. 이것을 바라봤던 홀로코스트 피해자였던 작가 한나 아렌트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으로 비롯되는 “악의 평범성”이란 화두를 남겼다. 인간이 사유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악으로 뒤덮힐 수 있다. 충직하고 뛰어난 능력은 재앙이 될 수 있다. 박 중령은 군인이 명령을 따르는 것은 전시 상황에서 지휘체계를 일사분란하게 운영하기 위함이고 자신의 상관을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명령을 의심하거나 반박할 경우 지휘계통이 무너지고 더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과연 틀린 말일까. 어느 조직이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하달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필수다. 그렇지만 그 전제가 중요하다. 그 명령의 전제가 악행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지 못하데 되면 문명 사회가 파괴되며 자신의 본분을 다한 것이 곧 죄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박 중령을 두고 화두를 던진 것은 아이히만처럼 “악의 평범성”과 더불어 “역사의 평범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를 열게 한 인물이 실상은 판잣집에 살며 청렴했던 우직한 군인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누구라도 우리는 범죄의 테두리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국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독재자의 그늘을 벗어나 새로운 시대가 열렸을 때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결국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일종의 법칙과 상통한다. 우리가 주권자로서 권리를 행사하며 지켜온 지난 날을 되돌아 볼때, 권력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합리적이지 않은 인간의 습성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사회적 구조를 추구해야 하는지 돋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다소 신파적인 박 중령의 개인사를 중심에 두면서 그 당시의 불합리한 판정에 대한 울분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로부터 40년 뒤 우리나라는 지금 어떤 환경에 처해있고, 지금 현재 각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행동하기를 “명령”받고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지점까지 연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