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_두 여자의 다이어리
거실엔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 위엔 노트북, 누군가가 읽고 있는 책, 아이들의 문제집 그리고 다이어리가 놓여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점, 나는 다이어리를 쓴다. 일기라기보다는 이를테면 딸아이와 함께 쓰는 잡기장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연초에 여기저기서 받은 다이어리 중 가장 크고 견고한 한 권을 골라서 우리 둘의 일기장으로 만들기로 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색종이, 노트, 작은 사물 어디든 메시지를
적어서 보여주곤 했던 딸아이에게 딱 맞는 소통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와 공유하는 다이어리에는 내일 아침을 시작하면서 아이가 읽을 수 있도록 짧은 편지를 쓴다.
대여섯 줄의 짧은 편지는 때로는 만우절이나 단오의 유래를 적어두기도 하고, 그날 계획된 특별한 일, 아이가 잘한 일에 대한 칭찬이나 격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소재가 된다.
그다음 줄엔 'oo이의 할 일'이라는 제목 아래 딸아이가 하루동안 해야 할 일들을 리스트업 해둔다.
책 읽기, 학교나 학원 숙제, 줄넘기 몇 번 하기와 같은 미션이 주어지고 그 옆엔 아이가 달성했을 때 체크할 수 있는 네모박스를 그려둔다. 그 아래엔 '엄마가 할 일'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과 네모박스가 동일하게 정리되어 있다.
마지막은 'oo이의 특별한 일'이라는 제목아래 빈 공백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딸아이는 짧은 일기를 그 자리에 쓰는 것으로 다이어리 한 페이지를 메운다.
아이는 엄마의 편지로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고, 하루 하루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씩 이행하면서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 습관을 만들어간다.
저녁이 되어 나 역시 퇴근 후 체크박스에 이행 여부를 표시하면서 엄마 역시 충실한 하루를 보냈음을 인증한다. 가끔은 아이가 체크해주기도 한다. 그 과정은 가족 모두 크든 작든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내고 있는
사람들임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건강한 본보기가 되어준다.
저마다 바쁜 하루가 지나고 나면 가족이 큰 테이블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재밌었고 힘들었는지, 어떤 착한 일을 했고 어떤 후회를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대부분은 내가 회사에서 누구 때문에 화가 났고 이런 문제가 있었지만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극사실주의 푸념을 늘어놓고 남편이 그 얘기를 잠자코 들어주는 식이다.
학원에 다녀와 늦은 저녁을 먹는 아들은 일하는 거랑 공부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힘든지를 묻고 나는 회사는 열받아서 힘들고 공부는 어려워서 힘든 거라고 답한다. 단, 일이든 공부든 대체로 힘이 드는데 그 어려움을 견디다가 가끔씩 느끼는 성취의 기쁨이 대단해서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는 나름의 개똥철학을 얘기하면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하는 6학년 아들과의 대화는 꽤나 재미가 있다.
때로는 아들이 대화를 주도할 때도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샤프 컬렉션을 줄줄이 읊으며 브랜드의 역사, 제품의 기능과 특징에 대해 한참 설명하고 나는 그런 디테일이 어떻게 다른 건지 직접 써본다.
아들이 얘기한 차이가 무엇인지 직접 체감하면서 샤프라는 작은 기계에 담긴 기술력과 동시에 아들의 잉여력에 놀란다.
생각은 많지만 감성은 드라이한 나와는 달리 딸은 마음이 섬세한 아이다.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예쁜 칭찬으로 매일 사랑을 표현하는 아이는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물어보면 거의 매일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으로 만족감을 표시한다.
'오늘의 특별한 일'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하루동안 경험한 사소한 일들을 하나하나 묘사한다.
그리고 일기의 마지막줄은 '내일 하루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무 설렌다'라고 쓴다.
좋은 일기는 특별한 일을 하나 골라서 자세하게 쓰고 느낀 점도 쓰는 것이라고 했더니,
하루가 너무 길고 일어난 사건이 많고 하나하나 다 소중한데 어떻게 한 개만 쓰라는 거냐고 반문했다.
호기심이 많고 사소한 일도 재미있고 신나는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와 얘기하다 보면 행복이 별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가 많다.
5 곱하기 3이 15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고, 어제 먹은 젤리와 오늘 먹은 젤리가 미묘하게 다르고, 길에 떨어진 아주 작은 씨앗도 눈에 보이는 아이에게는 세상에 불필요한 것이 없고 무의미한 이벤트가 없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일 년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지나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도 의미도 흐릿한 나와는 사뭇 다른 아이의 사고가 귀엽고 소중하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어쩌면 내 일상도 설레고 신기해할 만한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설령 행복은 아니더라도 감사할 만한 순간은 꽤 자주 있음을 꼭 인지하고 살아보자고 되뇐다.
사소한 하루와 소소한 이야기를 모아 4개월 넘게 거의 매일 다이어리를 함께 채워가고 있다.
언젠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엄마와 더 이상 나누고 싶지 않은 시기도 오겠지만, 조만간 연필로 꾹꾹 눌러쓴 다이어리가 아니라 SNS로 아이의 일상을 확인할 날도 올 테지만 그때까지 딸아이와 애정이 깃든 일기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