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having 10화

#잘 몰라도 리멤버

09_직장, 나의 발견, 약한 네트워크

by HoA

대기업에 다녀서 좋은 것은 살아오면서 미처 알아내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리더십은 있는 편이었지만 모두와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필요한 경우라면 앞에 나서지만 누구나와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거나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외동딸이었지만 외롭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고, 인간관계에 크게 연연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우선이라 곁에 있었던 사람을 챙기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어쩌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신이 나서 아주 재밌게 놀기는 했지만 그런 이벤트를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았고, 약속이 생겨도 좋지만 미뤄지면 더 편안한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리스크관리 분야에서 데이터 분석, 특히 모델링 업무를 필요 이상 오래 하면서 나는 꽤 오랜 기간을 극소수의 진지하고 내향적인 사람들과 함께했다.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과 모여 웃고 떠들 기회가 적어져 갔고 점점 혼자만의 세계로 몰입했다. 근무 중에 동료들과 잡담하며 농땡이 피우는 것을 불온하게 여겼던 나름의 순진한 소신이 있던 어린 시절이라 동료들과 소통을 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래 집단과도 거리가 생겼다. 때때로 심심했지만 고독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온전히 집중하고 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즐겁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아주 가끔 긴 대화를 했고, 회사에 대한 그의 고민과 나의 고민이 연결되어 각자의 사소한 문제가 본래는 연결되어 있고 내가 하는 일이 미처 알지 못했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할지라도 내 일을 아주 더 말끔히 잘해야겠다고, 같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고 서로에게 잔소리하고 의지할 때도 있었다.


일이란 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무지를 발견하게 된다. 일을 극도로 잘 해내는 과정은 개인의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포기하 고하하는 나약함이 팽팽하게 경합하는 게임과 같다. 어떤 세계에 들어선 초입에서는, 특히 3년 차쯤이 되면 내가 거의 다 아는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 상태로 다른 일로 전환하면 자기가 다 안 것 같은 착각을 한 채로 다음 페이지를 살게 된다. 하지만 다른 일이 아닌 같은 일을 더 오랫동안 하다 보면 그 안에서 모르고 있던 세계가 펼쳐지고 갑자기 다른 세계와 연결되기도 하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들어선 것 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많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자신의 무지를 덮고, 어떤 사람은 무엇이 있는지 계속 걸어 나간다.

지금이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혈기와 자존심이 있던 터라 나는 후자를 택했다. 눈이 소복이 내린 대지에 첫 발자국을 내는 것 같은 묘한 쾌감 때문에 굳이 추운 길을 걷기도 했다.


일 자체를 아주 많이 했고 주로 선례가 별로 없는 과제를 맡았다.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컸기에 스스로 해내려 애썼고, 사실 도와줄 사람도 가까이 없었다. 에둘러 표현하는 법을 잘 몰라 직설적인 표현 때문에 가끔 혼이 날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종국에는 고맙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상사를 만나게 되었다. 상사에게 인정받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지만 굳이 예쁨 받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지지는 않는 부류였다. 조직은 일하는 곳이지 쓸데없는 인간관계를 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는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지만 결코 맞지도 않은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일이 곧 내 자존심이고 그래서 납득이 되는 일을 아주 잘하고 싶어 하던 아마추어였던 것이다.

좋고 싫음을 떠나 주어진 자리에서 기량을 다하는 것이 프로라는 것을, 조직 생활이란 상사가 시키는 일을

그저 해내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던 미숙한 나이였다. 상사는 일을 적당히 하고 본인에게 복종하길 바랐고 나는 치열하게 일하고 내 할 말은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 기를 쓰고 그 안정적인 포지션을 박차고 나왔다.

여전히 대기업 조직원이긴 했지만 야인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사내 벤처를 꾸려 나와 신사업을 하면서 데이터 비즈니스를 맡게 되었고, 회사에서 하지 않던 신용평가로 사업화를 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받아냈다. 데이터 분석하던 사람이 갑자기 데이터를 파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까다로운 고객으로 데이터를 사주던 갑의 위치에서 데이터를 사달라고 읍소하는 을도 아닌 정의 자리에 섰다.

살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상황이 생길 거라고는 전에 상상해보지 못했다.

넉넉하진 않지만 늘 필요한 만큼은 주어졌고 내가 원하는 만큼 주어지지 않을 상황이면 구하기보다는

있는 자원을 효율화하거나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차선을 선택했기 때문에 요청은 나와 거리가 먼 재주였다.

회사 안에서 만들어진 내 캐릭터로는 도움을 청할 사람도 몇 없었지만 실질적 조언보다는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대충 살아라 정도의 위로가 전부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대충이 아니라 여유를 가져도 된다는 말이었을 텐데 그때는 그 말이 열심히 하라는 말보다 더 야속했고 오기를 발동하기도 했다.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을 수 있음을 인정했더라면 조금 더 편안했을 텐데, 자존심 때문에, 실패할 수 없다는 강박 때문에 빨리 성과를 내고 싶었고 결국 무리했다.

대기업에 속해 있었지만 스타트업 대표로 착각하고 일했다. 없는 인맥을 동원해 다른 금융회사에 영업을 나갔다. 당신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설명했고, 이 데이터로 당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상상하게 했다. 다른 회사들도 언젠가 진입할 것이기 때문에 빨리 도입해야 선점효과를 보게 될 거라는 가설에 가까운 논리가 어쩌다 통해서 유력 회사에 데이터가 팔렸다. 가끔은 페이스북을 보다가 어떤 기업의 광고를 보며 그 회사에서도 내가 만든 상품이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다짜고짜 DM을 보내 만나자고도 했다. 기업 소개자료를 보다가도 뭐 하는 회사인지 궁금해지면 전화했다. 그런 식으로 연락한 대부분의 업체가 답변을 주었고, 강남의 빌딩 중개인에서부터 유명 플랫폼사 대표까지 아주 많은 배경의 사람들을 압축적으로 만났다.

대부분 내가 찾아갔고 열심히 떠들고 또 들었다. 그중 아주 극소수만이 재무적 성과로 이어졌지만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사람이 변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견되는 본성 때문에 변하는것처롬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 처한 어려움을 알아내고, 해결책을 같이 찾아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과거에는 알지 못했었다. 가끔은 내가 하는 사업이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처한 문제상황을 듣고 같이 고민하다가 없던 상품을 만들기도 하고, 약한 네트워크를 연결해서 도움이 되는 형태로 조합하기도 하면서 전에 없던 일들을 했다. 물론 큰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같이 고민하는 내 모습 자체에 고마움을 느껴 본인에게 당장 불필요한 계약을 해주려고 하는 분도 계셨다.

다행히 나는 형편이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회사는 그 돈 없어도 괜찮으니 굳이 안 하셔도 된다고, 고객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팔고 맞지 않는 것을 사기 때문에 우리나라 데이터 경제가 활성화 안되는 거라고 말씀드리면서 정말 필요할 때 불러주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었다. 그런 진심을 알고 굳이 다른 회사 지인을 소개해주시는 고마운 분도 생겼다.


직장 내에서 나는 상사 비위 맞추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기분을 맞추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 상냥하게 대화하는 방법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무뚝뚝함이 툭툭 떨어지던 내가 가끔 고객사와 통화하는 모습을 동료나 가족이 재미있다는 듯 관전하기도 했다.

사실 그런 내 모습이 낯선 것은 정작 나 자신이었다. 어느 날 남편에게 내가 돈에 미쳐 그런 건지 이상해졌다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것이 진심인지 가면인지 나 자신도 혼란스럽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늘 그렇듯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난 당신이 원래 착한 사람인 걸 알고 있었지. 표현이 좀 거칠고 냉정하게 보일 뿐, 착한 사람이니까 뭐든 그렇게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인거지.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앞으로 주변사람한테도 자신한테도 좀 상냥해지기만 하면 돼요~.'

빈말이든 참말이든 늘 내게 칭찬해 주는 사람이지만 또 한 번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여전히 친절해지지는 않았지만 내 나름대로는 내 일이든 남의 일이든 해결해 보려고 내 힘으로 안 되는 일들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빌어서라도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다 보니 명함관리 어플에 등록된 사람이 천명이 훌쩍 넘은 우주인싸의 레벨이 되어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대부분일 테지만 궁금한 것을 물어볼 사람이 곳곳에 있고 때로는 내가 질문에 답하거나 적어도 적임자를 소개를 해줄 수 있는 연결점이 된 것이 꽤 의미 있는 변화일 것이다.

굳이 유통기간이 지난 인연을 되돌리거나 정기적으로 인사를 하는 수고를 할 생각은 아직 없다. 다만, 왁자한 모임엔 어떻게든 안 나갈 핑계를 찾던 나도 가끔은 보고 싶은 사람들과의 모임, 서로 알고 지내면 좋을 능력자들 간의 연결을 주선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것이 마흔 넘어 겨우 발견해 낸 나의 모습이다.


밥벌이를 하기 위해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때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아닌 나의 모습을 강요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습을 찾는 기회를 주는 곳이기도 하다. 나의 모습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성장의 과정은 성장통을 수반한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힘들지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예전과 똑같다고 할 것이다. 사내에서 내 모습은 아마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지점과 국면의 경험함으로써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도운 것은 아마도 회사일 것이다. 회사에 소속된 내가 비즈니스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자고 청했을 때 거부당할 확률은 자연인으로서의 내가 거부당할 확률보다 현저히 낮았다. 신사업하면서 대내적으로 가장 힘든 상황에서 나는 가장 많은 외부인을 얻었다. 모두가 깊은 관계는 아니나 부담이 적지만 연결이 되어 언제나 활성화할 수 있는 네트워크 안에 존재하고, 그 안에서 누군가에게 연락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배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나는 약한 링크와 용감함을 얻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과거에는 명함으로 존재했던 리멤버라는 명함관리앱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각자의 직업 안에서 자신의 본성과 맞는, 때로는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연대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의미한다. 은밀한 방식으로 적은 사람들이 똘똘 뭉쳐 만들어내는 힘보다 약하고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변화의 힘이 더 클 수도 있음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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