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성장과 어른의 성장에 관한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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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재는 갑각류 동물이다. 쉽게 깨지지 않는 단단한 외골격을 갖는다. 그 껍데기의 안쪽에는 사람들이 속살이라고 부르는 여린 몸이 있다. 문제는 몸집이 커져도 껍데기는 늘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몸이 자라면 자랄수록 외피는 더 조여오고 압박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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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후반이지만 성장소설 읽기를 좋아한다. 나는 『어린 왕자』나 『좀머 씨 이야기』,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작품을 최고로 여긴다. 성장소설에는 예기치 못한 상실이 있고, 상실과 맞바꾼 한 뼘의 성장이 있다.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내가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 있다.
어린 날의 성장은 상실과 관련이 깊다. 아이들은 애완동물의 죽음, 이사, 부모의 이혼, 드물게는 가까운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같은 것을 겪으며 존재의 고유함과 유한성을 깨닫는다. 아픈 깨달음이다. 상실과 맞바꾼 지혜는 가슴 깊은 곳에 남는다. 남달리 정이 많고 감수성 예민한 아이들은 먼 나라 올림픽이 끝나는 장면에서도 가슴 저릿한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점차 자라면서 아파할 일이 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민했던 마음은 무뎌진다. 예술가의 기질을 품은 아이는 남몰래 민감한 영혼을 유지할 테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아이들은 눈물을 창피함이나 놀림거리라고 여기며 자란다. 길에서도 잘 울던 아이가 이불 속으로, 옷장 안으로 숨어서야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몰래 우는 것을 눈물을 훔친다고 표현한다. 감정을 부끄러워하는 사회적 시선이 눈물을 도둑질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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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허락받은 모두가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기보다는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된다. 겉늙은 그들은 진정한 어른이란 드물다는 점을 깨닫는다. 어른보다는 ‘갑’과 ‘꼰대’에 가까운 권력자와 피할 수 없이 마주하면서다. 현실은 꿈보다 강력해 보인다. 성장이라는 꿈, 마음속의 어린왕자는 등을 돌린다. 더는 돌보지 않으므로, 영혼은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훌쩍 늘어버린 나이가 새삼스럽다. 어른들은 자신의 나이를 믿을 수 없는 순간과 마주한다.
가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팔순이 넘은 거장 피아니스트가 여전히 연습하는 중이라는 소식.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았을까. 연습하는 까닭을 묻는 질문에 그는 ‘요즘 실력이 느는 것 같아서 말이죠’라며 웃었다고 한다. 성장을 포기하지 않는 노인의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그들은 청년보다 빛나고 세상 다 산 것처럼 물러앉은 장년보다 젊다. 연습하는 사람은 삶이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다.
어른의 성장, 상실에조차 무덤덤해진 존재의 성장은 어떻게 이뤄질까. 불교에서는 백 척이나 되는 장대의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니까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절벽에서 발을 떼라는 얘기다. 『데미안』에서 그랬듯 어린 날의 성장이 알을 깨는 것에 비유된다면, 어른의 성장은 날개 없이 추락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혹은 밀랍 날개로 나는 이카루스의 시도. 한계를 지워내는 순간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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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압박을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이 자랐을 때 바닷가재는 껍데기를 버리는 방법을 택한다. 포식자로부터 안전한 바위 밑으로 숨어 자신을 지켜주던 껍데기를 완전히 벗어 버리고 새로운 외피를 만든다. 바닷가재는 죽을 때까지 탈피를 거듭하며 성장하는데, 심지어 나이가 들수록 껍데기는 더욱 단단해지고 집게는 강해진다.
나이를 먹으면서 바닷가재의 탈피는 점점 어려워진다. 오래 산 개체들은 스스로 벗을 수 없을 만큼 껍질이 단단해져서 탈피 중 지쳐 자연사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탈피를 포기하기도 하는데, 껍데기를 벗지 못한 바닷가재는 낡은 외피 탓에 세균과 오염에 쉽게 노출되어 질병으로 죽고 만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바닷가재의 이야기고, 인간의 경우에는 탈피를 두려워해 안전한 상태로 죽어가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는 결말이다.
*어느 랍비의 말씀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EXIF2hNmv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