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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차 Sep 09. 2018

보너스 게임

쉽게 생각해도 돼, 성공이 덧없듯 실패도 덧없으니까.

자신이 만드는 삶의 의미로, 날카롭고 위트 있는 농담으로 현실을 초월할 수는 없다. 과학 시간에 우주를 공부할 때나 혹은 『그래비티』 같은 영화를 보다가 우주의 티끌조차 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감에 대해 전율한 적 있지 않나. 인생은 덧없다. 헛되다. 부질없다. 그러나 한 번뿐이다. 아깝다. 소중하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은 어떨까. 故 신해철을 위한 서태지의 추도문 일부이다.


“언젠가 형이 그랬습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 자체로 목적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인생이란 그저 보너스 게임일 뿐이라고요. 따라서 보너스 인생을 그냥 산책하듯이 그저 하고픈 것 마음껏 하면서 행복하라고 말했었죠.”


어릴 적 초등학교 문구점 앞에 있던 작은 오락기가 생각난다. 나는 비행기 게임 『1945』를 좋아했다. 내 비행기가 다 터지기 전까지는 등교도 안 했기 때문에, 주인아저씨가 100원을 돌려주며 학교 끝나고 와서 다시 하라고 한 적도 있다. 아저씨는 내가 400원이나 이어서 지금 스테이지까지 왔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모르는 척했던 건데, 어쨌든 나는 100원으로 끝판까지 날아갈 수 있는 고수는 아니었다.


가끔 남은 목숨을 착각할 때가 있었다. 내 비행기가 터지고―아! 하는 좌절 가운데― 화면 아래에서 깜빡이는 새 비행기가 날아오는 것이다. 그럴 때는 기분 최고다. 한 판 더 싸워 볼 수 있다. 보너스 게임에 뛰어들어 미사일을 날리고 폭탄을 투하한다. 날아드는 탄알들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한다. 물론 내 실력에 클리어란 없다. 계속하겠느냐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조이스틱에서 손을 떼고 깨끗하게 돌아선다. 나는 ‘끝판왕’을 깨고 최종 승리를 한 적은 결코 없었던, ‘1945’를 좋아하는 꼬마였다.


비행기 게임 『1945 스트라이커즈』


삶이 덧없다는 결론 앞에서 나는 슬쩍 기분이 좋아진다. 이나마 한 번뿐이라는데, 안 태어났더라면 대체 어쩔 뻔했으며 성공이 덧없다면 나의 실패도 덧없을 것 아닌가. 아직도 가끔 그런 꿈을 꾼다. 나는 조종간을 쥐고 가죽 헬멧을 썼다. 꿈속에서 나는 전투기 대신 프로펠러가 도는 정찰기를 조종한다. 전후좌우만 계산하면 되는 차 몰기와는 다르다. 비행은 입체의 차원이다. 훨씬 자유롭고, 그만큼 더 막막하다. 기체를 품은 하늘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나는 갈 곳을 모른다. 방향이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문제인 모양이다. 정찰기에 탄 사람은 나뿐이다. 외로움을 달랠 FM 라디오 같은 것도 없다. 궤적은 몇 바퀴째 원을 그린다. 침을 삼키고, 목을 간지럽히던 조종복의 지퍼를 조금 내린다. 숨을 깊이 쉰다. 아까부터 속삭여오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정찰기는 부드럽게 선회한다. 엎질러진 물, 태어난 배꼽, 시작된 게임, 겨우 그런 거잖아, 듣는 이 없이 입술을 움직인다. 내게만 들리는 내 목소리를 따라 끝까지 가 보기로 한다. 어쩌다 사막 한가운데서 불시착이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 『어린 왕자』 같은 작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와 같이 그의 소행성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릴 거다. 꼭 빛나는 희망이 있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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