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진 화분을 맞고 죽은 사람 이야기
사망 시간 : 2020년 07월 19일, 10:36:49
한 순간이었다. 분명 태풍으로 인해 아파트 베란다에 내놓은 화분들을 수거하라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안내 방송이 일주일 전부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는데, 내 소중한 식물들은 그런 비바람이라도 맞아야 건강하게 살 거라고 생각했는지 413동 1101호 베란다에는 토기로 된 화분이 여전히 줄지어 있었다. 나는 운이 나쁘게도 그 시간에 413동 주변의 산책길을 걷다가 강풍에 화분들 중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인 나에게는 명품백이 두 개가 있었다. 구찌의 화이트 컬러 마몬트 숄더백과 펜디의 패브릭 재질 바게트 백. 이 두 개의 백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 그 친구는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가 되어서야 명품백에 입문해서 얼마 전에 루이뷔통 알마 bb 백을 처음으로 샀다. 내 죽음을 알리며 내 소중한 백들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전화하자 친구는 슬퍼하면서도 반겨했다. 나로서는 중고 마켓으로 가지 않고 믿고 맡길 새로운 주인이 생겨서 안심이 되었다. 죽은 건 죽은 거고, 백은 백이니까.
남편에게는 내가 평생 써 온 일기장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에 대해서 쓴 글이니까 나를 추억함에 있어서 사진이나 동영상보다는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었다. 내가 여태껏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같은 날 같은 상황에서 남편과는 어떻게 다르게 그것들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읽어보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었다. 그 중요한 걸 내 사후에 알게 되리라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기장에 너랑 싸운 다음에 쓴 내용들은 다 쌍욕이야."
그 말을 듣자 남편은 내 일기장을 받길 주춤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는데, 그런 아내의 유품인데도 말이다! 천성이 심약한 내 남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적나라한 욕이 쓰여 있는 내 일기장을 펼칠 용기조차 없을 것이다. 아마 그 일기장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일 수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기장을 아무 데나 버릴 수는 없고 누군가에게는 맡겨야 하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맡겨야 했으니까.
그리고는 홀가분해졌다. 내가 가진 것은 그 두 개가 전부였다. 길지 않은 인생을 취업 걱정만 하며 살았다. 대학 졸업 후에는 남들보다 늦은 취업에 전전긍긍했고,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젊은 나이에 대상포진까지 앓았다. 이십 대 후반에 겨우 취업을 해서 늦깎이 회사생활을 했지만 더 좋은 회사에 가고 싶어서 몇 년 일하다 퇴사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논문을 쓰는 도중에 결혼을 하느라 졸업이 좀 늦어졌다. 겨우 논문을 쓰고 졸업하자 남편이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원에 박사 과정을 시작하는 바람에 터전을 옮겼고, 그곳에서 직장을 구하다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0개월 뒤 출산을 했고, 2년 남짓 집에서 육아만 했다.
육아를 하면서도 내 관심사는 오로지 취업이었다. 어떻게 하면 경력단절 기간을 최소로 하고 다시 취업할 수 있을까, 어디에 취업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자영업을 할까, 스타트업을 할까. 자격증을 따면 취업에 유리할까, 육아하면서 딸 수 있는 자격증은 뭐가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만 하며 시간은 흘렀고, 나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혼자 쫓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쇼핑 중독에 빠졌고 어디 나가지도 않으면서 옷과 신발과 가방을 주야장천 사댔다. 남편이 주는 용돈을 악착같이 저금해서 날 위한 명품백을 샀다. 정작 들고나갈 일도 없으면서. 그리고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한 방책으로 매일 일기를 썼다. 사실 그렇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구나, 되게 우울한가 보다,라고 담담하게 자기 고백을 하는 정도였다.
별 거 없었던 내 삶. 두 돌이 갓 지난 아기와 헤어지는 것은 가슴이 미어지지만 내 인생만 놓고 봤을 때 이룬 것도 없고 쌓은 것도 없었던 삶. 그래서 딱히 정리할 것도 없는 삶. 이룬 게 많았으면 죽음이 이렇게 온 것이 아까웠을까. 저 멀리 검은 옷을 입은 형체가 보인다. 이제 취업 걱정 없는 곳으로 가서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