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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 Oct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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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암으로 죽은 사람 이야기

사망 시간 : 2017년 10월 09일, 00:29:50


79세, 삶을 마감했다. 췌장암 발병 확인 20일이 되던 날이었다. 어느 한 군데 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몸이 유달리 불편해질 때마다 평소 겪고 있던 당뇨 증상이 좀 더 심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러다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고, 그때 발견한 게 췌장암이었다. 이미 진행이 많이 된 상태이고, 간과 폐에 전이가 된 상황이라 치료는 무의미했다.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된 그녀는 가장 먼저 자식들에게 물려줄 유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편과는 사별한 지 몇 년 되었고, 슬하에 큰 딸, 작은 아들, 막내딸이 있었다. 자신이 가진 재산은 지금 살고 있는 33평 아파트 한 채와 고향인 전남 장흥에 있는 선산과 그 앞에 있는 밭 7 마지기 정도였다. 아파트와 밭은 팔아서 세 자녀가 나누어 가지면 될 테고, 선산에는 시부모님과 큰 아주버님, 남편의 묘가 있고 자신도 그 옆에 매장될 테니 제사와 차례를 맡을 사람 앞으로 명의를 이전하면 될 터였다. 

문제는 그녀의 장례 절차에 대한 것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가 죽고 난 직후 병실 문 앞에서. 


    "언니, 엄마가 장흥에 매장시켜 달라고 했던 거 진짜야?"

    "어, 어제 너 늦게 와서 못 들었지? 아빠 무덤 옆에 자리 있다고 거기에 묻어달래, 내가 미쳐."

    "그 자리에 고모가 들어간다는 거 아니었어?"

    "아, 몰라 몰라, 그쪽 집안이랑 엮이는 건 죽기보다도 싫어. 매장은 무슨 매장이야, 여기 근처에 추모공원 있으니까 거기에 수목장 하면 되지. 자식들이 다 수도권에 살고 있는데, 야, 장흥까지 명절마다 어떻게 내려가? 나는 못 가."

    "쉬, 엄마가 듣겠어. 그래도 산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은 사람 소원 들어줘야 되는 거 아냐? 아, 아닌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 건가? 갑자기 헷갈리네."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어떻게 사니. 상황이 안 되면 상황에 맞춰서 소원도 포기하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죽은 사람이 뭘 알겠니, 자기가 어디에 묻히는지."


그때 병원에서 사망확인서를 작성하고 장례식장 및 병원비 수납을 처리하고 온 둘째가 병실 문 앞에 누나와 동생이 속닥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다가왔다. 


    "여기서 뭐해? 누나, 엄마는 계속 침대에 누워 계시겠대? 죽기 전까지 누워만 계셨는데 밖에 산책이라도 하라고 하지 그랬어?"

    "응, 엄마 그냥 누워 있는 게 편하시대.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누워 있다가 본인이 어디 나가고 싶으시면 우리 부른다고 하셨어. 아, 선산 명의이전할 거야, 니 앞으로? 엄마는 네가 선산 소유하고 관리했으면 하는 눈치던데? 아무래도 아들이고, 거기에 다 장흥 고씨 사람들 묻혀 있는데 앞으로 너랑 니 아들이 쭉 이어가야 한다면서. 근데 올케가 좋아할지는 모르겠네."

    "누나, 내가 선산 가져간다고 하면 나 이혼 당해. 나중에 왜 선산 내 앞으로 안 해줬냐고 말 안 바꿀 테니까 누나랑 네가 알아서 해주라, 제발. 나는 나중에 죽으면 화장도 수목장도 싫고 그냥 화장터에 내 뼛가루 버리고 오고 싶은 사람이야. 근데 무슨 무덤 관리를 내가 해. 난 여행으로라도 장흥 근처에도 안 갈 거고 내 자식들이랑 강원도까지만 다닐 거야. 그 밑으로는 운전하기 너무 빡세."

    "아니, 근데 엄마는 고씨 집안사람들한테 평생을 시달렸으면서 무슨 그 근처에 자기를 묻어달라는 걸 유언으로 했대? 이해할 수가 없네. 미운 정이 무서운 게 이런 건가 봐."

    "흠, 일단 오늘 하루 동안 엄마를 설득해 봐야지. 설득해서 추모공원에 수목장 하신다고 하면 장례식 끝나고 그렇게 진행하고, 곧 죽어도 매장하시겠다 그러면... 우리 셋이 잘 합의해서 엄마의 뜻은 그러했지만 자식들이 못나서 매장은 못 해드리고 화장해서 여기 근처 납골당에 잘, 정성스럽게 모셔야지 뭐."


그녀는 병실 문 밖에서 나누는 자식들의 대화를 가만히 누워 듣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감정에 몰입하면 큰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면 자식들이 들을 테니 최대한 감정을 무감각하게 속이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다. 

억울한 마음을 감추어 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이었지만 내 마음대로 무언가를 결정해본 적이 없었다. 시집가기 전에는 친정아버지의 경제적 도움 아래서, 시집간 뒤에는 남편의 도움 아래서 살았기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아무 제약 없이 해볼 수가 없었다. 그마저도 남편의 사업이 망한 뒤에 꽤 오랜 시간을 시부모님과 출가하지 못한 형님과 함께 살았다. 시아버님이 당뇨로 많이 편찮으셔서 간병을 하면서 세 자녀를 키우느라 자유롭게 외출하지도 못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형님은 출가를 하셨는데,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그냥 둘 수가 없어 끝까지 모셨다. 시어머니는 백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 그나마 몇 년 전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이제야 삼시세끼 밥 차리고 집안 살림하는 걸 끝내고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서 해보려고 했는데 췌장암이라니. 죽음마저도 내 마음대로,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시아버님은 생전에 자신을 간병한 며느리를 생각해서 재산의 대부분을 남편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했으나 그 문제로 중간에 형님네 가족과 큰 마찰이 있었다. 남편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남편과 만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나는 큰 아주버님의 얼굴도 몰랐다. 듣기로는 시부모님께서 그 큰아들을 누구보다도 애지중지하셨고, 지병을 앓으셨을 때 간호사였던 형님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큰 아주버님만 간병하라고 하셨다 한다. 당시 남편은 군대에 있었다. 그리고 형님은 그 일을 근거로 시아버님께 유산의 대부분을 요구했고, 시부모님은 아무래도 그때 생각만 하면 꼼짝을 못 하셨으므로 결국 우리 집에는 밭 몇 마지기와 현금 얼마 정도밖에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내 자식들은 내가 시아버님 간병과 시어머니를 홀로 모신 것을 옆에서 봐 왔으므로 그런 형님에게 악감정만 남아 있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형님은 내 병문안도 안 오신 사람 아니던가. 


    "그 쥐꼬리만 한 유산 더 얻어가겠다고 그 난리를 친 사람을 뭘 생각해요? 그냥 남보다도 못한 사람인데. 내가 고모 아들내미들한테 유산 가지고 치욕당한 거 생각하면 진짜 아직도 속에서 천불이 나. 그리고 선산에 자기가 왜 묻혀, 이 씨 집안에 출가한 사람이? 그거 그냥 생떼 부리는 거잖아요, 엄마 못 묻게 하려고. 근데 그런 치사하고 더러운 곳에 대체 왜 묻어달라는 거예요? 엄마, 우리가 명절마다 아빠 산소 간다고 맨날 차 막혀서 고속도로에 5시간 넘게 갇혀 있으면서 했던 소리를 뭘로 들으신 거예요. 산소는 앞으로 선산 관리하는 사람이 대표로 가고, 엄마는 그냥 근처 추모공원에 수목장 하면 우리가 더 자주 가서 뵐게. 그렇게 해요, 네?"

    "너네들 마음은 내가 다 알지. 그래도 어떻게 부부가 다른 곳에 묻힐 수가 있니. 내가 너네 아빠를 가슴 절절하게 사랑해서 그 옆에 있고 싶어서 그런 거는 아니지만은. 아무리 너네 사는 곳에서 멀어도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하면 찾아 올 곳은 있어야 되지 않겠니. 여기 무덤에 우리 할머니 묻혀 있지, 하면서. 자기들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도 맡고 하면서."


사실 그녀의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 무덤이니 뿌리니 같은 소리는 핑계에 불과했다. 굳이 남편 옆에 안 묻혀도 그만이었다. 그저 그녀는 자신이 묻히고 싶은 곳에 묻히고 싶었다. 마땅한 장소가 생각이 안 났기에 장흥 선산이라고 한 것이었다. 과연 나는, 내 뜻대로 죽은 것이 아닌 나는, 내 죽은 몸뚱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자식들의 벽이 넘기 힘들었다. 나는 혼자인데, 저들은 세 명이니 아무리 내 뜻을 전달해도 그에 대한 반대가 3배로 돌아오니 설득하는 것도 지쳤다. 

그래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녀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이대로 놓치면, 이것까지 양보해버리면 자신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째와 얘기해보고, 그다음엔 둘째와, 그리고 막내와 각각 따로 얘기를 했다. 세 번에 걸쳐 자신의 전 인생에 대해 자식들에게 구구절절하게 전해주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결혼 전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시아버지 간병 때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시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이 정말 자신의 선택이었는지, 그러면서 세 자녀들을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그녀도 울고 웃었고, 듣는 자식들도 울고 웃었다.

세 자녀와 긴 시간을 대화하고 나서 지친 그녀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 숨을 고르다가 그녀는 문득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다. 오늘 하루 동안 자식들에게 그녀 본인의 인생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려준 것이 바로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남긴 셈이 되었다. 아마도 자식들은 그들이 사는 동안 그들의 기억 속에서 엄마를 생생하게 모실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죽은 몸뚱아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되어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도착했다. 그녀는 자식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식들은 추모공원에 전화해서 수목장으로 예약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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