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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 Oct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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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과 죽은 주인에 대한 이야기

사망 시간 : 2020년 10월 01일, 05:31:09


그와 헤어진 것은 내가 8살이 되던 해, 그가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난 이후였다. 우리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와 그의 아내, 첫째 아이, 즉 내 첫째 동생과 5년을 함께 살았다. 그러다 둘째 동생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맞벌이 부부에 두 자녀의 육아로 지친 그가 나를 충남 아산에 있는 그의 친가에 잠시 내려보냈었다. 명목은 산책을 오래, 자주 해주지 못해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할 거라는 점, 우다다다 뛰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좁은 아파트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한적한 동네에서 마음껏 산책하고 뛰어노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점 때문이었지만, 사실 이건 핑계라는 것을 나는 다 안다. 내가 사람이었다면 이런 결정을 하진 않았을 테니.

물론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그의 사정을 이해한다. 그는 매우 지쳐 보였다. 지친 그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나의 역할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는 내가 곁에 다가오는 것조차도 버거워했다. 그냥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렇지만 나는 그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그에게 다가가 내 엉덩이를 그의 몸에 붙이는 것,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걸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게 3년이 지났다.

나는 동물의 본능이라는 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따라 기분이 영 찜찜한 것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강한 촉이 왔다. 예전에도 그가 몸이 안 좋거나 접촉사고가 났거나 했을 때도 촉이 왔었지만 이렇게 강렬한 느낌은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는 느껴본 적이 없었어서 이번 촉은 절대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에게 가봐야 할 것 같다. 서울에서 아산으로 내려오는 길은 차를 타고 오면서 어느 정도 외워 두었다. 나는 이래 봬도 강아지 지능 순위 2위에 빛나는 푸들이니까.

나는 그의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문을 열고 나가는 틈을 타서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골목길을 몇 개 돌자 대로변이 나왔다. 세종평택로를 따라 뛰다시피 걸었다. 갈 길이 머니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선 안 된다. 중간중간 길가에 다른 개들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 있어 몇 번 멈춰 서서 냄새를 맡고 소변을 누었다. 하지만 이것도 너무 자주 하면 시간이 지체되니 유혹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늦지 않게 도착하길. 그가 말하길 사람들은 죽고 난 직후에 삶을 정리하는 24시간이 주어진다고 했다. 그러니 그 전에만 도착하면 된다.

자동차들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니 오성 IC가 나와서 출구로 나와 평택파주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고속도로의 갓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명절이나 생일 같은 이벤트가 있을 때 가끔 나도 데리고 친가에 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 도로에는 휴게소가 없어서 나에게 매우 미안해했다. 그렇지만 이 길이 제일 빠른 길이라 차를 오래 타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거라는 건 나도 안다. 차에 타기 전에 충분히 산책을 시켜주고, 배변을 할 시간을 주었기에 나도 힘들긴 했지만 버틸 수 있었다.


    "깨갱-"


옆을 지나가던 화물트럭의 바퀴에서 작은 돌들이 튀었다. 몇 개는 내 다리와 허리, 배를 긁고 지나갔고 몇 개는 내 몸에 박힌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겁보에 엄살쟁이다. 그가 곁에 있었으면 세상 죽는소리를 하면서 안겼을 텐데 지금은 엄살을 부려도 받아 줄 사람이 없다.

봉담 IC로 나와 과천봉담도시고속화도로에 진입했다. 목이 말라 혀가 길게 나왔다. 갓길 옆으로 자란 잡초들을 뜯어먹었다. 평소에 내가 선호하는 맛은 아니었지만 먹을 만했다. 나는 산책할 때도 목이 마르면 풀을 뜯어먹는 습관이 있는데, 그렇다고 아무 풀이나 먹는 건 아니고 쑥이랑 비슷하게 생긴 특정 풀만 먹었다. 그런데 지금 먹은 이 풀은 고속도로에서 수많은 차들의 배기가스를 먹고 자란 탓인지 맛이 엄청 썼다. 먹다가 거품 섞인 흰색 토를 몇 번 했지만 목이 말라서 어쩔 수 없이 계속 먹었다.

아스팔트 길이 거칠어서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발바닥 패드 곳곳이 까진 게 분명하다. 내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이 약간 속도를 늦추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나를 촬영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올릴 목적이겠지. 그도 나를 촬영해서 인스타그램에 많이 올리곤 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가 공놀이 하는 모습이나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 침대에서 자는 모습,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뒤져서 온 집안을 쓰레기 밭으로 만들었던 모습, 간식을 기다리는 모습, 내 생일에 시저 통조림으로 만든 생일케익을 선물로 받는 모습 등을 주로 올렸는데, 아이를 낳고부터는 나만 단독으로 찍지 않고 꼭 첫째 아이를 내 옆에 두고 찍었다. 강아지와 아기가 같이 있는 사진이 인기가 더 많다고 했다. 한창 첫째가 기어 다닐 때 내 다리를 손에 쥐고 당기거나 내 꼬리를 잡고 이리저리 휘저으려고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그 모습이 귀엽다고 그가 웃으면서 동영상을 찍길래 싫은 티는 못 내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물론 나중에 첫째 간식을 몰래 뺏어 먹는 걸로 복수했지만.

시간이 꽤 많이 흐른 것 같다. 아침에 출발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양재 IC로 나왔다. 이쯤 오니 익숙한 풍경인 게 서울에 다 오긴 한 것 같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진 지는 오래됐다. 그래도 여기까지 내 다리가 잘 버텨주었다. 내가 1살이었을 때 그와 함께 공놀이를 하다가 내 쓸개골과 대퇴골이 빠져서 수술을 했다. 처음에는 한쪽 다리만 아팠었는데, 한쪽이 아프니 다른 한쪽을 더 많이 쓰는 바람에 멀쩡한 다리도 문제가 생겨 결국은 양쪽 뒷다리를 다 수술해야만 했다. 그러다 첫째가 1살이 될 무렵 왼쪽 쓸개골에 근육을 고정하느라 박아 두었던 철심 주변으로 염증이 생겨 다시 수술을 해야 했는데, 그는 첫째와 아내를 아내의 친정 식구들에게 부탁하고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 입원시키고 치료시켜 주었다. 오랜만에 그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어서 아픈 건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좋았다. 그 이후로는 내가 너무 건강해져서 그와 둘이 병원을 가는 일이 없어 아쉽기도 했지만 말이다.

잠수교를 건너자 우리가 살던 아파트가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지하차도 계단을 오르고 골목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익숙한 아파트가 눈 앞에 나타났다. 새벽 시간이라 그런지 아파트 단지 내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서 쉽게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긴 시간을 도로에서 쉬지 않고 달리느라 내 몰골은 마치 길에서 사는 강아지 같았다. 내 곱슬거리는 털에 먼지가 잔뜩 끼였다. 아마 누군가가 발견했으면 경비실에 연락해서 나를 쫓아냈을지도 모를 행색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살던 곳이 1층이어서 나는 더 이상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문 앞에서 나는 그에게 내가 왔다고 왕- 하고 알려주었다. 몇 번 짖으니 현관문이 열렸다.

아, 저기 내 사랑하는 친구가 보인다. 머리 위에 하얀 링을 달고 있다. 그건 사람이 죽었을 때 생기는 표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저 멀리 검은 옷을 입은 형체도 보인다. 그건 산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는 보인다. 살면서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멀리 있어도 나는 바로 알아봤다. 그는 나를 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나에게 달려와 나를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울면서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아우- 하고 같이 울었다. 온 가족이 그와 나를 껴안고 함께 울었다. 첫째는 그새 많이 커가지고 나에게 물도 떠다 주었다.


내 사랑하는 친구, 내 사랑하는 주인, 내 사랑하는 가족이었던 사람아, 나는 당신을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다. 당신을 향한 내 감정은 항상 사랑과 고마움, 그리고 그리움밖에는 없었다. 이제 편히 잠들길, 먼 길을 쉼 없이 달려오느라, 물 한번 마시지 못하고 오느라 너무나 지쳐버린 내 육신도 제 할 일을 다 했는지 감각이 사라지고 숨이 멎어가는 게 느껴진다. 이제 편히 잠들길, 우리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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