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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 Oct 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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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환으로 죽은 사람 이야기

사망 시간 : 2018년 02월 19일, 14:54:22


조용한 경제학과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렸다. 방학 중이라 전화 올 데가 거의 없을 텐데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가 계속 울리는 통에 이 조교는 핸드드립 하던 커피를 잠시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그래. 나 김영식 교수야."

    "네? 김.. 영식 교수님이요....?"

    "그래, 그 오늘 오후 2시에 비전홀 대관해놓고 경제학과 60학번부터 다 전화해서 1시까지 모이라고 해. 그리고 현수막에는 <김영식 교수 부고 기념 사후 강연회>라고 하고, 그 케.... 케.... 뭐야, 그 조그만 간식들, 먹을거리들, 음료들 부르는 거, 그거 다 준비해놓고."

    "자, 잠시만요, 어르신. 죄송한데 저희 과에는 김영식 교수라는 분은 안 계시는데요?"

    "... 이 요망한 자식이, 너 몇 학번이야?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지금 학교에 차준기 교수 있지? 걔 연결해, 얼른!"


이 조교는 그제야 조교 업무를 거쳐간 선배들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50년대 학번 중에 우리 학교 교수를 거쳐간, 한참 전에 퇴임해서 이제는 경기도 양평의 한 요양원에서 지낸다는 김 뭐시기라는 할아버지 교수가 있는데 때마다 조교실로 전화를 건다는 것이었다. 통화 내용은 항상 같았는데 지금 경제학과에 재직 중인 정교수부터 시작해서 부교수, 조교수의 근황을 묻고, 그 교수들이 다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이었고, 수업 시간에는 그들이 어떤 태도로 강의를 들었으며, 그들의 결혼 주례도 다 본인이 해줬고, 스승의 날만 되면 그들이 어떤 선물을 해마다 해왔는지에 대한 역사... 등등. 그러면서 자기가 강의했던 강의실은 그대로인지, 그때는 강의실 출입문이 자주 고장이 났었는데 지금은 다 고쳤는지까지 물어보느라 그 전화만 받으면 조교 업무는 몇 시간이고 일시 중지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전 선배들은 일부러 전화기를 고장 낸 뒤에 행정실에 문의해서 발신자 번호가 뜨는 전화기를 구매 요청했고, 그 이후로 요양원 번호가 뜨는 전화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전화를 신출내기 조교인 이 조교가 마침 받은 것이었다.

이 조교는 김영식 교수 전화를 차준기 교수 방으로 연결했고, 드립 중인 커피는 잊은 채 초조하게 다음 전화를 기다렸다. 분명 통화가 끝나면 차 교수가 다시 전화를 할 것이었기 때문에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계속 전화기 앞을 서성였다. 그리고 마침내 차 교수님 방 내선번호가 찍힌 전화가 왔다. 


    "이 조교, 김영식 교수님 전화받았지? 그대로 해 드려. 아무래도 어제 돌아가신 모양이야. 우리 과 60학번부터 지금 학번까지 김영식 교수님 부고 사실 알리고, 오늘 1시까지 비전홀로 다 모이라고 메일 보내고 문자 보내고 전화도 다 돌려. 아마 지금 장관님이랑 우리 과 출신 국회의원들은 연락이 힘들 거야. 그래도 어떻게든 보좌관들한테 잘 얘기해서 그중에 한 분이라도 모시도록 해. 케이터링 준비하고. 오늘 박 조교, 서 조교 쉬는 날이지? 전화해서 학교 나오라고 해서 셋이 같이 준비해. 내가 행정실에 전화해서 비전홀은 빌려 놨다. 그럼 수고."


중간중간 한숨을 푹 쉬면서 업무 내용을 지시하는 차 교수의 목소리엔 피곤한 기운이 역력했다. 이 조교는 자신의 지도교수인 차 교수의 지시 사항을 빠짐없이 받아 적고는 박 선배와 서 선배에게 연락해서 내용을 전달했다. 다행히 박 선배는 같은 동 연구실에 나와 있었고, 서 선배는 학교 근처 자취방에 있었다.  

셋은 업무를 분할해서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 조교는 현수막과 엑스배너 제작, 비전홀 자리 배치, 해당 명단의 이름표와 방명록 준비, 비전홀의 미디어 장비를 점검하는 역할을 맡았고, 박 조교는 당일 오후에 서비스 가능한 케이터링 업체와 커피 전문점을 수소문해서 찾아본 뒤 수의계약을 맺고 비전홀 로비에 업체와 함께 세팅하는 일을 맡았다. 셋 중에서 가장 선배이자 박사 과정을 수료한 서 조교는 경제학과 동문들에게 연락하고 경제학과 출신의 정재계 인사들을 초청하는 일을 맡았다. 아무래도 이런 행사 경험이 가장 많았고, 과 행사에서 언제나 의전 담당이었기 때문에 서 조교가 적임이었다. 아마 서 조교가 연락하면 진짜로 장관이 올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조교가 비전홀에서 마이크와 모니터와 기타 음향 장비들을 손보고 있을 때 머리 위에 하얀 링을 단 김영식 교수가 비전홀로 들어왔다. 갓 맞춘 듯한 남색 양복에 반짝거리는 소재의 하늘색 넥타이와 넥타이 핀을 하고, 손목에는 로렉스 시계까지 찬 김영식 교수는 본인이 말한 시간보다 한참 전인 11시에 학교에 도착해서 준비과정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아마 강연회 때 읽을 원고인 것으로 보이는 A4 용지가 들려 있었다. 85세에 노환으로 사망한 사람 치고는 너무나도 정정한 모습이었다. 정정하다 못해 삶에 대한 광적인 집착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당신이 아까 전화받은 사람이요?"

    "아, 네, 교수님. 아까는 몰라 봬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거 참, 차 교수가 본인은 완벽주의자면서 제자는 그렇게 못 키웠나 보네. 나는 안 그랬는데 말이야. 다음부턴 실수하지 말아요. 잘 준비되고 있구먼. 나는 총장이랑 커피 한잔 마시고 올 테니 계속 수고해요."


궁금하지 않은 자신의 스케줄을 굳이 이 조교에게 알리고선 김영식 교수는 자리를 떴다. 이 조교는 이미 죽은 사람한테 쩔쩔매는 지도교수나 커피 한잔 하겠다는 총장이나 이렇게 아침부터 개고생을 하고 있는 조교들이나 죄다 이해가 안 갔지만 본인은 지도교수의 명을 어길 수 없기에 하던 일을 마저 했다. 

그런데 정말로 이 조교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오후 1시가 되자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경제학과 동문들이 밀어닥치는 것이었다. 다들 이런 자리가 매우 익숙한 듯 서로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고, 서로서로 인사를 시켜주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름표를 받아 가슴에 달고, 방명록을 쓰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케이터링 음식들을 일회용 접시에 담아 먹기 시작했다. 이 조교와 박 조교와 서 조교는 이런 광경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다가도 계속해서 들어오는 선배 동문들 때문에 감상할 틈도 없이 일을 해야 했다. 

그 순간 비전홀 정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비에서 한가롭게 음식을 먹으며 삼삼오오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삽시간에 로비는 혼잡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야, 사람들이 물었고 정문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기재부 장관이 도착했다는 말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죽은 사람의 사후 강연회에 기재부 장관까지 오다니. 이 조교는 김영식 교수가 대단한 건지, 여기에 온 사람들이 한가한 사람들인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서운대학교 경제학과 동문들께 먼저 인사를 올립니다. 저는 이 강연회의 사회를 맡은 차준기 교수입니다. 지금부터 김영식 교수의 부고 기념 사후 강연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인이 되신 김영식 교수님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1분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 강연회의 주인공이신 김영식 교수님께서 나오실 때 뜨거운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아, 뒷자리까지 잘 들리세요? 아이고, 우리 장관님, 바쁘신데 이 노인의 마지막 강연에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존경하는 경제학과 동기, 동문, 후배님들. 저보다 선배는 안 계시겠지요? 허허. 네? 아이고, 우리 55학번 김홍기 선배님도 오셨어요? 어디 계세요? 아, 저기 앉아 계셨군요. 선배님, 아유 아직 정정하시네요! 제가 학번은 더 낮아도 죽는 건 선배가 되었네요, 허허. 아, 저기 우리 국세청장 출신 김갑수 후배님도 오셨고. 퇴직하고 여기저기 강연 다닌다고 바쁘다더니 여긴 어떻게 또 오셨대요."


김영식 교수의 사후 강연회는 30분 동안 김영식 교수가 참석한 사람들 중에 자기 기준으로 중요한 사람들을 짚어가며 공개적으로 안부를 묻고 자신의 영향력을 마음껏 과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200명 규모의 비전홀은 꽉 찼다. 산 사람들을 앉혀 놓고 머리 위에 링을 단 죽은 노인이 강단 위에서 위풍당당하게 강연하는 모습은 돈 주고도 못 보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공개적인 인사치레가 끝나고 김영식 교수는 이제 자기가 준비해 온 원고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자신의 태어난 일시와 장소, 가족 소개, 약력 등등이었고 스스로 읽어 내려가는 자기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삶에 대한 가슴 절절한 추모사였다. 한편으로는 대기업 채용시험에 제출하는 자기소개서 같기도 했다. 


    "저 김영식 교수는 1936년 경북 영주에서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중략)"


스스로를 교수라고 칭하는 게 신기했다. 이 조교는 예전에 서 조교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해외에서야 교수가 수많은 직업 중 하나지, 대한민국에서 교수는 신분이자 계급이라고. 한번 교수는 죽을 때까지 교수라고,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박사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려고 한다는 얘기를 지나가는 말로 했었다.

가래 섞인 기침을 해대가며 한참을 원고를 읽어 내려가던 김영식 교수가 갑자기 뭐에 홀린 사람처럼 허공을 보더니 기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무슨 말을 하는데 마이크에서 멀어져서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던 김영식 교수가 이제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서인지 마이크를 통해 그의 말이 비전홀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니, 이 양반이, 이거 5분이면 다 읽어요! 저리 가! 내가 누군지 알고. 나 장관 후보까지 오른 사람이야!"


산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는 듯한 김영식 교수의 모습은 기괴하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다들 김영식 교수가 어제 죽은 건 알았지 사망 시간은 몰랐던 터라 지금 이 시간이 죽은 지 24시간이 지난 시점이라는 것도 그 장면을 보고야 알게 되었다. 그가 강단 위에서 쓰러지고 사회를 맡은 차준기 교수가 누군가를 불렀다. 시체를 수습할 구급차와 구급대원을 미리 준비시킨 차 교수의 완벽한 대처에 이 조교는 소름이 돋았다. 저 사람이 내 지도교수라니.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웅성웅성하면서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눈치껏 깨닫고는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비전홀을 나가기 시작했다. 나가면서 하는 말을 들으니 장례식장에서 보자는 말들을 하고 헤어지는 듯했다. 

오전부터 행사 준비를 하느라 하루를 새하얗게 불태웠던 이 조교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텅 빈 비전홀 좌석에 앉아 강단 위에 붙어 있는 <김영식 교수 부고 기념 사후 강연회> 현수막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이미 죽은 사람의 강연회에 다들 이렇게까지 모인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모습에서 이 조교는 답을 얻은 듯했다. 아마도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걸.


    '나도 죽고 나서 저렇게 해달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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