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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혜 Feb 25. 2022

피어나다

단편소설 15 화 ― 完

 톱니 하나는 기계를 못 봤다. 약업 흐름 속 약사는 개인이었다. 바퀴 일부였다. 온화는 시선을 틀었다. 눈앞만 보았다. 쌓은 최선은 언젠가 보람을 주겠지. 당장은 아니더라도. 순간마다 두리번거리지 말자. 의미를 찾으려 일하지 말자. 약국에서 하나를 얻었다.


 몇 시간 전을 되새긴다. 해가 중천이었다. 오 국장은 마지막까지 던졌다. 온화는 얼떨결에 받았다. 주름진 회색빛 봉지였다. 가운데 찍힌 파란 약국 마크도 덩달아 쭈글쭈글했다. 무심히 비닐을 걷었다. 새빨간 육면체가 빛을 뽐냈다. 칠만 원. 가격표가 떡하니 붙었다. 비타민 비 군을 함유한 영양제였다.

 이때다 싶었다. 온화는 슬며시 창고를 향했다. 상자를 꺼냈다. 출근길에 준비한 둘이었다. 고구마 케이크와 과일 생크림 케이크였다. 누구 취향에 맞출지 몰랐다. 온화 취향이 아님은 확실했다.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에 나쁠 테니, 오 국장은 안 먹지 않을까. 직원과 약사는 나눠 먹겠지. 온화는 상자를 건네며 인사했다.

 ― 한 달간 감사했습니다.

 오 국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걸 준비해, 하고는 말했다.

 ― 마지막 날인데, 오전 근무만 하고 가.

 선심이 유일하게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약국에서 들은 말 중 가장 반가웠다. 조급함을 감추려 애썼다. 조제실에 인사를 돌렸다. 창고로 바삐 걸음 했다. 걸쳤던 가운을 벗었다. 빳빳한 태는 사라졌다. 흰 목덜미는 때가 탔다. 구겨진 허물을 가방에 대강 넣었다. 빨랫줄에 옷걸이가 주렁주렁 열렸다. 코트는 아슬하게 달렸다. 재빨리 낚아챘다. 팔을 끼우자 한기가 들었다. 겨울 광선은 유리문에 굴절되었다. 찬란했다. 온화는 끝까지 도망치듯 약국을 빠져나왔다. 개화강 역을 향했다.


 과거는 온화를 이룩했다. 약학대학에서 수학한 이론은 약국에 온 실습생을 규정했다. 업무로 실존을 망각했다. 내뱉은 언어는 일상에 허우적댔다. 불안이 피었다. 한 번 죽었다. 비로소 앞을 본다. 질문한다. 가능성을 미래로 내던진다. 현존재는 의미를 밝힌다. 이미 완성된 세계 속, 실존에 대하여, 단편으로나마. 하이데거 뒷말을 잇는다. 기투(企投) 한다. 선로 너머 강변이 보인다.

 열차에 오른다. 표지판은 잽싸게 뒤편으로 내달린다. 개화강역 Gaehwagang Stat. 글자가 흐려질 즈음이다. 누렇게 마른 무궁화밭이 차창에 맺힌다. 온화는 눈을 비빈다. 분분한 분홍. 겨울날 볼 일 없는 빛깔이 어른거린다. 만개한 꽃 머리다. 하늘로 얼굴을 활짝 피운다. 폐부가 저릿한 꽃향기로 가득할 즈음이다. 온화는 마침내, 약국이 무궁하길 빈다.



― 『약국의 무궁』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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