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다 세계여행 Nov 12. 2019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의 여행을 위한 조언

※ 여행일정이 빡빡하고 글이 잘 안 써져서 연재가 하루 늦었습니다. 또한 기존에 예고드린 "히피에게서 행복을 배우다"는 15일 금요일에 발행됩니다. 죄송합니다 :(

라이킷과 구독, 그리고 댓글을 부탁드려요! 독자와의 만남이 작가에겐 가장 큰 행복입니다.


1.

온 세상이 해야 할 것 투성이다.


 꼭 가져야 할 아이템, 꼭 먹어봐야 할 음식, 꼭 봐야 할 영화. 정작 사고 나면 얼마 안가 잊힐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굵은 글씨로 써진 '머스트해브(must-have)' 광고 문구에 눈길이 끌리는 건 인지상정이다. 이 말을 처음 지어낸 마케터가 있다면 마케팅 협회가 공로상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죽기 전에 할것들만 하다가 죽을것 같은데...?


 여행도 예외는 아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가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난 여행계획을 벼락치기로 세웠다. 구글 지도를 폈다. 어디선가 들어본 유명한 지명들을 찍었다. 당연히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OO여행이란 키워드로 검색해 사진 몇 개만 보고 여행지들을 추가했다. 그중 몇 개는 '죽기 전에 봐야 한다'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이것들만 다 다녀도 족히 10년 치 여행목록이 나올걸? 그렇게 여행지를 찍고는 가까운 곳끼리 연결했다. 그 루트에는 네팔의 에베레스트와 중국 윈난성의 후타오샤(호도협)가 있었다.

2.
 하지만 계획은 일그러지기 마련이지.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랬던가. 이전 글(https://brunch.co.kr/@greeda/29)에서 얘기한 이유로 티베트에 가지 않았다. 중국-네팔-인도였던 루트가 중국-인도로 바뀌면서 에베레스트가 빠졌다. 중국에서 네팔로 비행기를 타자니 직항이 없다. 가격도 비싸다. 결국 인도에 먼저 갔다가, 북인도를 돌아보고, 델리에서 네팔로 비행기를 탄 뒤에, 네팔에서 인도 바라나시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경로(빨간선)가 기존 경로(파란선)보다 훨씬 지저분하다.


 그런데 인도에 들어와보니 계획이 또 틀어진다. 한국인이 안도에서 받는 도착비자로는 60일 간 2회 입국이 가능하다. 문제는 인도라는 나라가 워낙 크고 지역색이 강해서 60일도 모자라단 거다. 네팔에 들르면 적어도 3주는 날아간다. 가뜩이나 시간이 없는데 굳이 네팔에 들러야 하나?


 결정을 내려야 했다. 고민 많이 했다. 마땅한 결론 없이 머릿속에서 예송논쟁이 펼쳐졌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네팔에 왜 가야 되지?"


 본질을 잊고 있었다. 왜 가야 되지? 또렷한 이유가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니까'라는 이유로는 스스로도 납득이 안됐다. 근데 그거 말곤 없는데. 걷고 경치보는거 좋아하지만 최소 1주, 길게는 3주 동안 등산만 해도 좋겠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에베레스트에 집착한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이름값 때문이었다. "네팔에서 에베레스트 보고 왔잖아"라는 한마디가 얼마나 간단명료한가. "K2 보고 왔잖아"라고 하면 분명히 따라나올 "그게 어딘데?"라는 질문에 구구절절이 설명을 붙여야 한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구차해진다. 에베레스트는 그럴 필요가 없다. 결국 내가 에베레스트에 가고 싶은 이유는 '유명하니까'였다.


실제 에베레스트 정상(19.05.22). 정상에서 셀카를 찍기 위한 대기줄이다. 사람사는거 다 똑같다.


3.

 중국에서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윈난성에서였다. 처음 여행을 출발할 때 윈난에 대해 알았던 건 리장 옛마을과 후타오샤가 전부였다. 가는 방법도 몰랐다. 윈난에 도착해서야 정보를 얻어 경로를 구체화했다. 리장-후타오샤-샹그리라가 동선상 적절했다. 그런데 하필 내가 가려던 날에 후타오샤가 폐쇄됐다. 폭우로 산사태 위험이 있어서란다. 리장이랑 후타오샤를 보려고 윈난에 왔는데 목표가 날아갔다. 어떻게든 보겠다고 아등바등 계획을 뜯어고쳤다. 일단 샹그리라에 간 다음 후타오샤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다 샹그리라의 호스텔에서 루시오라는 이탈리아 청년을 만났다. 그는 폐쇄된 후타오샤에 몰래 들어가 1박 2일을 하고 나왔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에게 밀착해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봤다. 거의 30분을 인터뷰했다. 그때, 어떻게든 후타오샤의 등짝을 보겠다는 나의 욕망을 느낀 그가 말했다.


후타오샤... 후타오샤를 보자...!
가고 싶으면 가. 그런데 갔다온 입장에서 얘기하면 좋긴 한데 그렇게 대단하진 않아. 후타오샤가 유명한건 리장이랑 샹그리라라는 유명한 관광지 사이에 있어서야. 가는 길에 들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샹그리라 근처에도 좋은 트레킹 코스가 많은데 후타오샤에만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유명하다는게 무조건 좋은건 아니잖아.(Popular doesn't mean great.)


 순간 머릿속이 밝아졌다. 나는 후타오샤에 집착하고 있었구나.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이랬을까. 아는게 후타오샤 밖에 없으니 거기에 집착했고, 그곳에만 집착하니 다른 여행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초기 정보도 방송에서 얻었다. 대단하지도 않은 정보다. 나무만 보다 숲은 못 본 거지.


4.

 '터널링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행동경제학자 센딜 멀레이너선이 제시한 개념이다. 특정 목표 하나만 바라보면 터널에 들어간 듯 그것만 보인다. 목표를 달성하는덴 유리하지만 다른 것들은 보지 못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특정 색깔 사물의 이름을 대라고 했을 때, 몇 개의 예시를 제공받은 그룹은 그렇지 못한 그룹에 비해 훨씬 적은 정답을 얘기했다. 인간은 하나의 정보를 얻으면 그것과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생각을 차단한다. 아예 모르는 것보다 조금 아는게 더 위험한 이유다.


터널에 들어가면 출구밖에 안 보인다.


 이런 경향이야 만국공통이지만 한국인에게 더 심한 것 같다. 물론 100% 뇌피셜이다. 한 여행자에게 들은 얘기인데, 여행하다 만난 인도인이 "왜 한국인은 북인도만 가고 남인도는 가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실제로 남인도의 여행정보가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인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대부분 북인도여서 그런 것 같다. 북인도뿐만이 아니고 다른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보이는데서만 보인다. 없는 데는 한 명도 안 보이다가 보이는 데는 한국어 메뉴판이 있는 한국식당이 있을 정도다. 한국인이 많지 않은 윈난성에서도 후타오샤만 가면 한국인 정모가 벌어진단다. 한국인이 '유명세의 권위' 혹은 '내가 알고있는 얘기'에 약하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5.

 그래서 나는 에베레스트에 가지 않기로 했다.


 물론 에베레스트도 멋있겠지. 하지만 이미 틀어진 경로를 어거지로 돌려놓는 동안 내가 놓치는게 더 많다. 그보다는 지금 만나고 있는 애증의 인도를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남들 좋다는 여행지를 다녀본 결과 느낀 바가 하나 있다. 남들 좋다고 나한테도 좋은건 아니다.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여행지'를 잊어야 '지금 이 순간, 나만의 여행'이 다가온다. 때론 앞만 보지 말고 앞뒤 왼쪽 오른쪽 위아래 다 봐야 한다. 우리는 경주마가 아니고 여행자니까.


 아등바등 모아놨던 여행지 리스트는 접어둘 시간이다.


예고

 매거진 <그리다 세계여행>의 다음 글은 "히피에게서 행복을 배우다"에요. 오직 요가를 배우겠단 생각만으로 인도에 온 히피들, 그들에게 행복을 물었습니다. 11월 18일 금요일 오전 7시 30분에 공개됩니다.
 '인증샷 관광'이 아닌 '생각하는 여행'을 지향하신다면 <그리다 세계여행>을 구독해주세요!


※ 이미지 출처 (출처 생략 시 직접 촬영)

1. 썸네일 : brobible.com

2. 에베레스트 대기열 : Ben Fogle on Twitter

3. 등짝을보자 패러디 : 네이버웹툰 <선천적 얼간이들>

4. 터널 : hoshanarabbah.org

5. 여행자 뒷모습 : momondo.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