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혹한 말들
식빵을 먹을 때 제일 먼저 포도잼을 바른 것을 먹지 말걸. 오늘 아침 끼니를 때우며 생각했다. 순하디 순한 우리 아기가 요즘은 통 잘 먹지도 않고, 자주 보채고, 낮잠도 밤잠도 자주 깨고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포도잼이 발라진 육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진정 육아의 쓴맛이 시작된 걸까?
눕혀두면 혼자 뒤집고서는 되돌지 못해 울고, 되돌아 놓으면 또 짜증을 낸다. 침을 많이 흘리고 손가락을 쉼없이 입에 가져가는 것을 보아하니 첫니가 나려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따금 지어주는 미소를 보면 뭉친 승모근도 살살 풀리는 기분이다.
어느새 인생 5개월 차. 이 시기를 두고 뒤집기 지옥, 이앓이 지옥이라고 말하지만은 지옥이란 말은 (아직까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지옥에 이리 귀여운 악마는 없을 테니 말이다. 뭐 다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가장 스트레스 받는 부분은 잘 안 먹는 것이다. 잘 먹어야 잘 놀고, 잠도 잘 자는데 잘 먹지 못하니 짜증을 계속 부리고 토끼잠을 자고 있다. 표준 체중 그래프대로 착실히 자라려면 잘 먹어야 하는데..... 오늘도 젖을 가운데 두고 아기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다.
“아니 이게 네 젖줄인데 왜 안 먹겠다는거야? 나중에는 싫어도 네가 벌어 먹어야 돼요. 엄마 젖이 네 젖줄일 때가 좋지, 이 자식아”
이 자식, 저 자식. 분명 좋지 않은 말인 것은 알지만 내 품의 이 아이는 말 그대로 내 자식이니 이렇게 불러도 아무렴 괜찮지 않나 생각한다. 아니 이 자식이란 말보다 젖줄이라는 말이 더 재밌다. 젖줄. 이 자식은 커서 뭘 해 먹고 살려나? 정말 이 자식이 엄마가 먹여주는 밥 없이 살 만큼 크긴 크는 걸까?
“너는 완전 평균 중에 평균 아니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만삭의 나를 보며 말했다. 항상 앞서 나가는 삶을 살아오다가 사정이 꼬여 취업이 늦어진 친구는 어딘가 뒤쳐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저녁을 먹고 집에 도착해 검색해봤다. 우리나라 평균 여자 결혼 연령 31세, 출산 연령은 33세. 만 나이로 했을 때 나는 평균보다도 많이 앞서 있었다. 그러니까 친구의 말은 틀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평균적인 사람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사람이다.
친구는 분명 부럽다는 의미로 건넨 말이었는데 그 말을 곱씹을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릴 적 나는 비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주말 저녁 연속극 말고 첩보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부모 형제들이랑 복닥복닥하고 애인이랑 지지고 볶다가 결국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사는 주인공의 언니 같은 역할 말고, 지구를 좌지우지하는 사건을 해결할 단서를 쥔 채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저 자식을 밥 먹여 학교에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이 딱할 만큼 지루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식도 모자라 새를 기르며 훨훨 날아가게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새가 죽자 작은 열대어들을 기르며 다른 물고기들이 잡아먹지 못하도록 알을 솎아내는 엄마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다르게 아주 비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나는 아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엄마보다 돈에 매달리지 않고, 더 넓은 집에 살고, 더 가정적인 남편을 두었으나 그 양상은 다르지 않다. 심지어는 그 평범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마저 남들보다 더 빨랐다. 나는 더 빨리 평범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일했고, 사랑했던 것인가.
“여보, 만약에 우리 애가 공부를 못하면 어떡할 거야?”
“다른 재능을 찾아줘야지”
“그럼 만약에 30명 중에 15등을 하면?”
남편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30명 중 15등은 중간값으로 평균인데도 걱정이 되는 등수 같았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상위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아이의 성공은 부모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것만 같은 그 평균값.
평범. 뛰어나거나 특색 없이 보통인 것. 사람들이 일컫는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나니 특색 없이 보통의 노력만으로는 그 평범한 삶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성인이 되기까지 나를 책임질 수 있는, 적어도 그런 의지가 있는 부모로부터 신체 건강히 태어나 의무 교육을 이수하고 월급이 밀리지 않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 조직이 바뀔 때마다 소외되거나 신체 및 언어적 폭력에 노출되지 아니하고 탈 없이 적응하는 것.
그와 동시에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나와 동일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 것, 제도에서 허락하는 범주 내에서 결혼하고 큰 어려움 없이 아기를 출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길러낼 수 있는 것.
각 단계를 무탈하게 지나게 될 확률을 곱하고 곱해서 평범한 생을 살아갈 확률을 구하면 그리 높지도 않을 것 같은데. 각 확률이 운에 기인하다고 생각하면 평범한 사람은 지극히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우리는 그 삶을 평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건 마치 OECD 평균 같다. 어떤 통계가 OECD 평균보다 낮다고 말하면 엄청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OECD는 20개국으로 시작한 작은 경제협력기구로 오늘날에도 회원국은 겨우 38개국에 불과하다.
UN에 등록된 국가만 193개국, 세계지도에 표시된 국가는 237개국, 국제법에는 242개국이나 되는데! 상위 십오퍼센트 국가들의 평균이 우리가 생각하는 평균이고 평범의 표준과 기준이 된다니. 주말 연속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가정이 평범한 가정의 표본이 되는 것처럼.
아기가 태어난 후 첫 달을 보내고 소아과에 진료를 보러 갔었다. 표준 체중으로 태어난 아기가 체중이 제대로 늘지 않아 평균 체중 미달이라는 이야기를 의사에게 전해 듣고 나는 울었다. 예방접종을 한 아기도 울지 않는데 엄마라는 사람은 그 꿋꿋한 아기를 안고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평균 미달’이란 말이 꼭 엄마 자격 미달이란 말인 것만 같아서.
그 후로 우리 부부는 소수점 둘째자리 수까지 잴 수 있는 정밀체중계를 샀고(정확히는 선물 받고), 하루에도 몇 번 아기를 체중계에 올려가며 체중의 증감을 확인했다. 많이 나가는 날에는 좋은 부모 표창이라도 받은냥 의기양양했다가 적게 나가는 날에는 그 표창을 박탈당한 것처럼 풀이 죽었다.
분명 잘 먹이고, 트림도 시키고, 기저귀도 제때 갈아주고, 안아주고, 사랑을 주면서도 부모로서의 자격을 자꾸 의심하게 된다. 평균이란 말이, 표준이란 말이 이렇게나 가혹하다.
아가야. 요즘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생겼다. 바로 엎드린 네 옆에서 빨래를 개는 시간. 나른한 오후의 햇살, 너의 옹알이 소리, 접을 때마다 폴폴 나는 아기 냄새, 정갈하게 개인 손수건의 행렬.
거슬리는 것 하나 없는 그 평화의 시간을 보내며 엄마는 나의 어머니의 인생이 딱하지도, 지루하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누군가의 삶은 직접 살아보지 못하고서는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너를 태중에 품으면서 나는 너에게 비범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면 명함 하나쯤으로 사건을 종결할 수 있는, 아니 그냥 나의 자식이라는 것을 드러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난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해보고, 시도해보다가 결국 실패하고 패배감이 들 무렵 너의 뒤집기가 시작됐다. 너는 뒤집고 싶어서 안달이 나고, 뒤집은 후에는 또 되집고 싶어 발버둥을 쳤다. 엄마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옆에서 힘내라고 외쳐주는 것 뿐이었다.
그제야 이 세상에 명함만으로 아이를 구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는 걸 실감했다. 네가 엄마 배를 박차고 세상 밖에 나온 그 날부터 너는 스스로 자랐다. 혼자 뒤집기를 해냈듯 되집기도 해낼 것이며, 앉는 것도, 서는 것도, 걷는 것도, 달리는 것도, 그 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 것도 모두 너의 몫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많은 이 엄마는 네가 평범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크게 다치지도 아프지도 않고, 목표를 품으면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할 줄 알고, 그 노력만큼의 결과가 돌아오길. 너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 너도 그 사람을 아껴주길.
엄마는 지금처럼 곁에서 열심히 널 응원하고 있을게. 우리의 삶이 포도잼이 가득 발라진 인생은 아니더라도 속이 촉촉한 식빵의 삶이길 소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