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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Aug 02. 2022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우울

아기를 재우기 위해 토닥거리다가 나도 덩달아 졸던 날이었다. 긴 장마가 지나고 반짝 해가 솟은 날이었다. 졸린 눈을 끔뻑거릴 때마다 풍경이 변했다.


끔뻑 한 번에 하얀 침대보가 홋카이도의 하얀 눈밭으로 변했다. 아기가 움직일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끔뻑 두 번에는 눈밭 위로 순식간에 라벤더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침대 밑이며 천장까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 가득했던 어둠이 점점 푸르게 변하더니 이내 나는 바닷속에 잠겨 있었다. 저 멀리 남편이 보였다. 수면 위로 떠 오르니 검푸른 심해의 색은 온데간데없고 투명한 에메랄드의 바다가 눈앞에 있었다.     


팔을 감싸자 모래알이 알알이 느껴졌다. 씻으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이미 샤워장에 와있었다. 몸을 씻어내고 밖으로 나왔는데 사람들이 곁눈질을 해댔다. 밑을 보니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얼른 가슴을 감싸자 잠에서 깼다. 아무도 내 가슴을 보지 못했다는 것보다 아기가 아직 자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느닷없이 여행지의 풍경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것들의 출처는 분명 나의 기억들인데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잠깐 본 것처럼 아득히 멀고, 단절되어 있었다. 사진첩을 열어 여행 사진들을 들춰봤다. 쨍한 색감의 옷을 입은 여자가 꿈에서 본 풍경들 한가운데에서 활짝 웃고 있다.


“어 맞네. 이거 나 맞네”




잠깐 파리에서 살던 때가 있었다. 파리에 가기 전까지 해외여행이라고는 어떤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하면서 부상으로 다녀온 뉴욕 여행이 전부였던 때였다. 시골 끝자락에서 태어나 세상이 넓다는 것은 책으로만 접해온 나였는데, 파리에 도착하니 웬걸 정말 세상은 넓고도 가까웠다.     


그때부터 여행에 살짝 미쳐 있었다. 온몸에 열이 나는데도 수업을 듣겠다고 학교에 다녔던 십수 년의 삶을 뒤로한 채 그냥 비행기 특가가 나오면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는 수업도 버리고 여행을 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 낮 싸구려 비행 편들은 10유로 밖에 되지 않았으니 수업 때문에 이를 놓치는 것이 바보 멍충이가 아닌가.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부터 느꼈던 설렘을 기억한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어 발끝이 들썩거리던 그 기분을. 겨울의 유럽에서 비를 쫄딱 맞고도 추위를 잊은 채 거리를 헤맬 만큼 뜨겁고 발랄했던 그 기분을.

  

직장에 다닌 후 정기적인 급여가 생긴 후에는 더 맹렬하게 여행을 다녔다. 한 달에 한 번씩 해외로 여행을 다녔다. 우기 사바나의 벼락같이 떠도는 나의 일정과 예산을 모두 맞춰줄 친구는 없었기에 혼자 많이 다녔다. 아니 그냥 혼자가 좋았다. 모든 것을 오롯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고, 나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완벽한 이방인이 되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또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는데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끝도 더 이상 간지럽지 않았고, 비행기가 착륙하면서 덜컹이는 것마저 짜증이 났다. 여행이 질릴 만큼 다녀보고 싶다고 얘기하던 나였는데, 정말 그날이 온 것이었다.     




요즘 나는 매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수유를 한번 하고, 아침 여덟 시쯤 아기의 부름에 깨어난다. 다시 젖을 주고 같이 놀다가 아침을 대충 챙겨 먹는다. 아기를 재우고 집안일을 조금 하다 보면 아기는 다시 깨고, 나는 다시 아기 젖을 준다. 시계를 보면 벌써 세시가 넘어가고 있다. 맨날 하는 대사도 똑같다.


“어? 벌써 세시가 넘었어?”     


늦게 점심을 챙겨 먹고 또 아기랑 놀아주고 재우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퇴근한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하루가 어느새 다 갔구나 생각한다. 저녁을 함께 먹고 아기가 목욕을 하고 나오면 로션을 발라주고 마지막 수유를 한다. 아기가 잠든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내 하루도 끝이 난다.     


그런 하루들이 백일이 넘게 쌓였다. 무력함과 무기력함의 그 중간 어딘가에서 나는 부유하고 있다.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것도 질려 제대로 해 먹지 않게 됐다. 기분을 전환해보겠다고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파트 단지를 돌아봐도 좀처럼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따금씩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 밖으로 나가 만나는 친구들, 저녁을 함께하는 남편. 일시적인 위로는 되지만 아기가 잠들고 집안에 덩그러니 놓이면 이내 우울감에 잠식된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삶에 갑작스럽게 초대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기를 보며 느끼는 잠깐의 기쁨 외에 다른 감정은 거세된 것 같은 너무나 낯선 단조롭기 그지없는 나의 삶.

     


“잘 지내지?”     


“행복해 보여”     


“이렇게 사는 것도 행복하지 않아?”     


아기와 함께하는 삶은 어떠한지 묻는 주변의 물음에 그저 행복하다고 답한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다. 우울하다고 말하는 것이 꼭 모성이 없는 어미라고 말하는 것 같아, 아니 어쩌면 그런 비난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 앞에서는 우울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활짝 웃어 보인다. 우울함을 고백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삶이다. 우울해도 웃음을 지어 보여야 하는 삶이다. 어미의 삶은.     

     



공항으로 가는 길이 더 이상 설레지 않던 날을 떠올린다. 그날도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찾아왔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오르는 것,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에서 긴 줄을 견디는 것,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것, 시차로 고된 하루를 버티는 것, 다리가 아플 정도로 돌아다니는 것,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모든 시간이 행복했었는데, 그날은 가방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긴 줄은 짜증이 났고, 좁은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을 때는 구역질이 났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이 견딜 수 없이 지루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상술한 요즘 내 하루의 일과가 평화로움에서 단조로움으로, 안정적임에서 무료함으로 바뀌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아기를 품 가득히 안아본다. 안으면 다칠까 걱정될 만큼 작았던 아기가 이제 살도 붙고, 목도 잘 가누는 덕분에 폭 안으면 제법 포근하다. 온몸 구석구석 뽀뽀를 해준 후에 같이 집안 구경을 한다. 품에 안긴 아기는 고개를 홱홱 돌려가며 이것저것을 구경한다.      


“맨날 보는 건데 신기해? 재밌어?”     


대답을 하는 건지 뭔지 아기는 ‘꺄아’하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자기 목소리마저 신기한 모양이다. 나에게는 좁디좁은 이 공간이 아기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신기한 세상이라는 것이 위안이 된다. 세상을 누비는 것이 질려버렸던 나도 한때는 집안을 구경하는 것에 설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위로가 된다.     


내 삶을 망치러 온 천사. 우울의 원천이자 위로의 샘. 가장 작은 세상이자 가장 무한한 세상. 나의 아기.     


     



아가야, 오늘은 글이 좀 우울하지? 뭐 그럼 내가 너를 기르면서 매일 행복했을 줄 알았니? 우울이 하루를 파고드는 날이면 나는 우는 너를 옆에 뉘어 놓고는 내가 더 큰 소리로 펑펑 울고 싶었다. 엄마 울음소리가 너보다 백배 천배 더 크다고 너한테 알려주고 싶었다니까.     


그래도 울음을 꾹 참아내고 환하게 너를 향해 웃었다. 그럼 너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짝하고 웃는다. 꺄르르 소리까지 내면서. 그럼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린다.      


“이 바보야, 엄마는 사실 울고 싶다고!”     


라고 말하면서.      


우울을 벗어나기 위해서 엄마는 이 시간은 사실 우리가 함께 보낼 수많은 날들 중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다 지나고 나면 우리 둘만 있었던 이 시간들이 그립겠지? 네가 말대꾸도 못하고, 엄마밖에 모르던 이 시간으로 몹시 돌아가고 싶겠지? 마치 엄마가 그 지난한 여행길을 오늘에서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너도 우울한 시간을 보내게 되면 생각하렴. 그 우울의 시간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그리고 너에게는 마르지 않는 위로의 샘이자 무한한 세상인 엄마가 있다는 것을 말이야. 네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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