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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Sep 16. 2022

영원한 여름

나의 생일

아기의 생이 시작된 지 180일이 조금 지났다. 이제 손을 다룰 수 있게 된 아기는 자기 앞에 놓인 물건들을 만지려고 손을 뻗고, 내 얼굴이며 머리를 매만지고는 한다.


얼굴에서 가장 만지기 쉬운 코를 손에 가득 쥐었다가 콧구멍으로 손가락을 넣고 그 손가락을 다시 내 입에 넣는다. 초등학생 때도 맛보지 못한 나의 코딱지. 요즘 나의 삶의 맛은 코딱지보다 살짝 더 짜다


아!     


올해 생일 아침은 외마디 비명으로 시작했다. 머리채를 쥐고는 놓지 않는 녀석. 내가 울상을 짓자 키득키득 웃어댔다. 양들의 침묵에 버금가는 순도 백퍼센트의 잔혹함. 엄마 생일이니 그만 놓아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생일빵이냐며 더 머리를 가져다 대니 그제야 놓아주었다. 아무래도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


아기가 거실에서 노는 사이 지난밤 남편이 퇴근하고 끓여둔 미역국과 생일상을 차려준다며 지난 주말 엄마가 해두고 간 반찬들을 꺼내 먹었다. 호사스럽게도 여전히 남들이 만들어준 음식으로 생일을 대접받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생일 전 주말부터 퍼부어댄 술 때문에 정작 생일에는 숙취에 찌들어 있거나 밤새 클럽에서 춤을 추고 와서는 쾨쾨한 머리 냄새로 해가 중천일 때 일어났을 하루. 그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피어올랐다. 머리채 소동으로 시작된 올해 생일이 어색하지만 싫지 않았다.




태어나 생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준 동력들을 생각해 본다.


오빠를 지켜주고 싶었던 의지, 엄마의 삶에 위안이 되고 싶었던 연민, 새로운 것을 배웠을 때의 희열, 상을 받고 단상에 오를 때의 기쁨, 비행기표를 예약해두고 여행을 기다리는 설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을 만큼 쏟아진 사랑.


고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 위의 가로등이 꺼진 적이 있다. 하필 내가 지나갈 때 깜빡거리다가 탁하고 꺼져버렸다. 세상이 나를 등진 기분에 휩싸인 채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가로등이 꺼져 슬프다고 말했다.


“그럴 수 있어. 오늘 힘들었구나? 원래 힘든 날에는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나는 거야”


생을 살아내면서 죽고 싶은 순간이 없었겠냐만은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었다. 살고 싶게 하는 것들이 죽고 싶은 이유들보다 훨씬 많았다. 우울해지는 날엔 나의 우울마저 사랑받던 날을 기억해낸다. 그럼 살만하다.

    



태풍이 지나가고 맑게 갠 하늘, 시원하게 부는 바람.     


“네가 태어난 날부터 바람이 시원했어. 그날부터 가을이었어”


엄마는 내 생일 때마다 이 말을 건넨다. 올해도 역시 빼먹지 않았다. 아마 나를 낳던 그날의 풍경이 삼십 년이 지나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오늘에도 생생하기 때문이겠지. 유난히도 날이 좋았다던 내가 태어나던 날. 덕분에 나는 그 여름날이 영원하라는 의미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영원한 여름. 다분히 로맨틱하다.


올 생일에도 어김없이 날씨가 좋았다. 얼른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도어록 버튼 눌리는 소리가 났다. 오후 반차를 쓴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 것. 아기를 바삐 안고는 셋이 함께 봐 두었던 레스토랑에 가 근사한 식사를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근처 노천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무화과 타르트 한 조각을 시켰고, 그 위에 초를 꽂았다.


눅눅함 없이 부는 가을바람이 내가 초를 불기도 전에 몇 번이고 불을 꺼버렸다. 남편은 애써 다시 초를 붙였고 나는 아기를 무릎 위에 앉혔다. 부는 바람에 아기의 얇은 머리가 흩날렸다. 흩날리는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니 다시 불이 붙었다.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나는 초를 불었고, 소원을 빌었다.


우리 생에 영원이 있기를 빌었다. 이 여름날이 영원하기를. 우리 세 가족이 매해 반복되는 이 날을 영원히 기념할 수 있기를. 영원히.


     

신입생들과 학회 엠티를 가던 날이었다. 늦은 저녁 청량리역에서 가평으로 가는 전철을 갈아탔을 때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동생은 엄마가 너무 아파해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고 말했다. 아빠는 멀리서 퇴근해서 달려오고 있고, 본인은 집에서 오빠를 봐야 해 함께 갈 수 없었다며 울었다.


아직 열려있던 전철 문 밖으로 뛰쳐나와 용산으로 갔다. 멍한 머리로 그저 ‘용산역 용산역’ 되뇌이며 잰걸음으로 걸었다. 가장 빠른 기차표를 예매했다. 자리가 없어 입석이었다.


기차에 올라 5호차에 마련된 열차 카페에 앉고나서야 드는 정신. 정신이 들자마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구름 하나 없이 맑은 날씨였건만 내 기억 속의 그날 밤은 비가 내린다.


엄마가 위암 때문에 위를 절제한 지 5년도 채 되지 않았던 때였기에 나는 이번엔 엄마와 정말 이별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홀로 구급차에 실려가는 것이 엄마 인생의 끝이라니. 슬프게도 참 엄마답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이제 못보게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오빠는 이제 누가 돌볼 것이며 고등학생인 동생은 어떡할 것이며 아빠는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설마 오빠를 시설로 보내야하는 건지, 나는 대학을 계속 다닐 수 있는 건지, 오빠를 시설로 보내지 않으려면 내가 고향으로 내려가야하는 건지.


엄마의 부재가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과 문제들 앞에 선 나는 엄마와의 이별을 오롯이 슬퍼할 수 없다는 것이 슬퍼 더 울었다. 지금껏 엄마의 짐을 함께 나눠들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죽음 후에 남겨진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 그 인생이 잠시 내 어깨에 내려앉고 나서야 알게 된 그 무게. 숨이 막힐 정도로 버거운. 아틀라스의 지구.




퉁퉁 부은 눈으로 도착한 병원. 엄마 이름이 걸린 병실 앞에서 흔들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문을 열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병실 안에서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울에서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 엄마에게 나는 가지 못하고 문 앞에 주저앉아 울었다.


“아이고. 엄마 안 죽어”


힘이 되고 싶어서 간 병실이었는데 힘이 되어주는 것은 역시나 엄마였다. 엄마가 그때 했던 말이 정말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생에 영원히 우리가 함께였으면 좋겠다.     




아가야. 엄마 아빠와 함께 지낸 첫 엄마의 생일은 어땠어? 우리가 영원히 이날을 함께 보낼 수는 없겠지만 엄마는 이날의 풍경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엄마는 태어나 너를 낳아 행복해. 너를 낳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행복해. 태어나서 행복해.


살다 보면 우울한 날도 있고, 못 견디게 슬픈 날도 있을 거야. 정말 별거 아닌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날도 있겠지. 누군가를 잃게 될까 두려운 날도 있겠지.


하지만 생을 지속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이 너의 생에 가득할 것이라 엄마는 굳게 믿어. 너의 우울을 보듬어주고, 슬픔을 헤아려주는 존재들이 분명 있을 거야.


하필 누구도 곁에 없는 날에는 네가 엄마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임을 기억하렴. 너는 엄마 삶의 가장 큰 축복이고, 가장 큰 행복이니까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주렴.


나중에 나중에 우리가 이별해야 하는 날이 오면, 엄마는 너에게 태어나 행복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디 태어나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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