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이를 보내고
풀잎이는 십여년전 스피츠와 포메라니안 사이에서 태어났다. 십일년 전 봄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는 갈색과 검은색, 흰색이 섞인 부드러운 털로 덮여있었으나 점점 커가면서 검은색 털은 사라졌고 갈색과 흰색이 도드라졌다. 흰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검은 눈과 그 눈만큼 새까만 코가 예쁜 강아지다. 풀잎이는 귀엽다는 말보다, 앙증맞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이 어울린다. 길죽한 주둥이와 도톰한 꼬리 때문에 가만 보면 여우 같기도 하다.
동생이 중학교를 다 끝마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아프던 시절, 엄마는 동생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동생의 오랜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동생 손을 잡고 생전 쳐다도 보지 않던 애견샵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사실 동생은 말티즈를 생각하면서 엄마를 따라나섰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동생을 기다려 온 것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반겨주는 세 가지 색이 섞인 작은 강아지를 보고서는 마음이 바뀌었단다. 그리고는 그 아이를 데려와 풀잎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대학교 신입생 여름방학. 나름 서울 사람이 되었다고 멋부리고 내려간 집에서 처음 풀잎이 만난 날. 나는 기대보다도 더 큰 귀여움에 놀라 신발도 벗지 못한채 무릎을 꿇고 풀잎이를 안았다. 그리고 방학 내내, 방학 마다 나는 풀잎이 옆에서, 풀잎이는 내 옆에서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목욕을 하고, 잠을 잤다. 침대에 올라오지 못해 낑낑대는 소리에 풀잎이를 안아 올려주면 항상 내 발밑이나 머리맡에 누워 잠을 잤다. 커서는 침대 위로 뛰어 올라와 함께 잠을 잤다. 잠이 든 풀잎이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털을 쓰다듬을 때 나는 온전히 평화로웠다.
그 숨소리는 이제 이 땅에 없다. 숨을 거두기 하루 전 엄마가 구급차에 타고 갔다는 전화를 한 날처럼 동생은 울면서 내게 풀잎이가 이제 곧 떠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아침 기차로 내려갈게”
“글쎄.... 내일 아침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임신한 후부터 나는 풀잎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임산부가 강아지나 고양이와의 접촉을 통해 톡소플라즈마라는 병에 걸리면 태아에 악영향이 간다는 이유에서였다. 출산했을 무렵 풀잎이는 백내장에 걸렸고, 점점 시력을 잃어갔다. 보이지 않으면 더 예민해져 공격성이 커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나는 아기가 혹시 물릴까 걱정해 풀잎이를 보러가지 않았다.
일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보러 가지 않다가 이제서야 나는 마음 한 귀퉁이에서 신을 끄집어내 제발 내일까지만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 많은 시간들은 다 흘려보내고 하루라는 시간을 벌어달라고 울며불며 비는 내 모습이 위선적이고 끔찍하기까지 했다.
“지금 운전해서 내려가. 밤에도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야간 운전을 해보지 않아 아침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던 내게 용기를 건넨 건 남편이었다. 비겁함과 끔찍함에서 나를 구하는 사람이 신보다 가까이 있음에 감사했다. 시동을 켜자 조명이 환하게 길을 비췄다. 신에게 빌어야 하는 시간이 하루에서 두 시간으로 줄었다. 눈물을 부여잡으며 내달린 밤.
집에 도착하면 항상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부터 현관문을 긁는 소리가 났었다. 문을 열면 껑충껑충 뛰어 안겨서는 온몸 구석구석을 핥아주던 녀석이, 세차게 흔드는 꼬리에 바람이 일 정도로 반겨주던 녀석이 그날은 없었다. 조용한 현관이 어색해 빠르게 들어선 집안. 소파 아래에 놓인 쿠션 위에서 풀잎이는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풀잎아. 언니 왔어. 너무 늦게 왔지? 미안해. 언니가 미안해”
풀잎이는 꼭 감았던 눈을 한번 크게 떠보이더니 아주 천천히 꼬리를 한번 흔들어 보였다. 바람이 일지 않았어도 혼신을 다해 반겨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제 왔냐는 비난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비겁함과 위선을 모두 용서해주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풀잎이를 안았다. 개물림 사고를 걱정한 내가 한심스러울 정도로 여윈 몸이 품 안에 들어왔다.
곡기를 끊은 지 나흘쯤 됐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는 피를 쏟아 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가 깨끗이 목욕을 시켜주고 예쁜 옷과 함께 쿠션 위에 놓아주었다고 했다.
가만히 풀잎이의 발바닥을 만졌다. 기분이 좋아지는 말랑말랑한 촉감. 그 말랑한 발바닥이 풀잎이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풀잎이의 귀에 우리가 함께 달리던 날들을 이야기했다.
계주선수씩이나 했던 내가 풀잎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그만 멈춰달라고 간식으로 회유하던 날들을 말해줬다. 아파트 뒤편에 수풀로 된 비밀스러운 입구를 지나 인적 없는 클로버 가득한 풀밭에서 목줄을 풀고 마음껏 뛰놀게 해주었던 날들도 말해줬다.
아기를 낳고 느낀 사랑이 기시감이 들었던 것은 필시 너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정에서 온 것 같다고, 이기적인 내가 주는 사랑을 배운 것은 네 덕분이라고, 개를 기르는 방법을 몰라서 실수투성이였던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우리에게 와주어 고맙다고. 동생을 살려줘서 고맙다고. 그런 말들. 마지막 말들.
새벽 풀잎이의 발이 머리 위로 느껴져 눈을 떴다. 가슴을 만져보니 힘없이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다시 잠에 들었다가 눈을 떴다. 쿠션 밖으로 빠져나와 내 머리맡에 누워있는 풀잎이. 미세한 신음소리. 내 조용한 노래 소리. 이후 다시 잠에서 깬 새벽. 고요함. 느껴지지 않는 심장박동. 그 어디에도 없는 숨.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 숨을 거둬갔다. 언제나처럼 나의 머리맡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구나. 아픈 육신으로 우리를 기다리면서 힘겹게 생을 버티고 있었구나.
온가족이 함께 풀잎이를 묻어주러 가는 길. 바다처럼 넓은 저수지에 트는 붉은 먼동. 그 옆으로 펼쳐진 가을 들녘의 황금빛. 가을빛의 흙. 다시는 매만질 수 없는 보드라운 털. 촉촉한 코. 말랑한 발바닥. 풀잎이 냄새.
풀잎아. 언니야. 너는 땅에 묻혔건만 나는 하늘을 보며 너를 찾을까? 네가 가고 지상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어. 네 묘가 혹시 떠내려가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오늘 하루를 보냈어. 잘 있겠지? 잘 있는 거지?
빨래 바구니에 넣어둔 네가 떠난 날 입었던 옷을 다시 꺼내 냄새를 맡았다. 냄새가 없었다. 그 짙었던 냄새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고는 네 사진을 몇 장 인화했다. 아무런 걱정도, 적의도, 슬픔도 없이 오로지 사랑만으로 가득한 두 눈망울. 내 생은 언제나 어딘가 결핍되어 있었는데. 겉으로는 동그래 보이지만 슬픔들이 조각난채 흩어져 구석구석이 뚫려있는 삶이었는데.
네가 조건 없이 늘 같은 모습으로 주었던 오롯한 사랑이 거품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라서 내 슬픔의 구멍들을 메꿔주었다. 너의 사랑은 우리 가족을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흩어지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힘이었다. 너의 죽음 앞에 우리가 한자리에 모인 것처럼.
너를 보내고 오는 길에 하늘을 보면서 언니는 죽음의 두려움을 덜게 됐다. 죽고 나서 하늘에 닿으면 네가 언니를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 죽음의 문턱에서 네가 현관문 긁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너는 비록 떠났지만 네가 남긴 사랑은 지상에 그대로 남아있다. 네게 배운 그 사랑을 나의 아기에게 모두 남겨주려고. 너의 사랑 위에 나의 사랑을 켜켜히 쌓아 지상에 사랑이 가득하도록.
그래도 너무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오늘처럼 비로, 바람으로, 강물로, 별로, 아침해로, 파도로, 풀잎으로 언니에게 종종 와주렴.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또 만나. 우리 강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