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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Aug 09. 2023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첫 번째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씻겨주는 기계는 누가 안 만들어주나? 비척거리며 겨우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기어들어가면 희한하게도 전신에 들러붙어 있던 피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남편과 아이의 숨소리가 혼성 듀엣의 것처럼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루면, 나의 눈동자는 말똥말똥 혼자 놀기를 시작한다.      


 내가 가장 취약해지는 시간과 공간이 먼 데로 나를 데려간다. 홍시보다 무르고 마른 낙엽만큼 연약해 작은 충격에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나는 어느새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교차하며 제멋대로 나부낀다.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야무지게 삼킬 줄 아는 어른이 되었으면서도 불면의 밤이면 이불 아래 숨어 아이의 얼굴이 되고 마는 것. 나의 침대는 쉼과 분주함을 동시에 제공한다. 다행히 여기는 가장 안온한 공간이라 위험한 모험 후에도 피 흘리는 일은 없다. 나 아닌 누군가도 같은 밤에 번민하고 있다면 부디 깜빡깜빡 신호를 주길.      


 "여기 사람이 안 자고 있어요!"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존재와 무, 1943>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다. 인간이 어떠한 목적에 의해 이 세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 속에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그의 실존주의는 희망적이면서도 한편으론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자유는 형벌과 다름없고 속박 없는 선택은 암울한 운명을 은폐하려는 일종의 쇼처럼 느껴졌다. 나는 일생 쿨한 사르트르가 남 탓하며 징징거리는 소인배들의 입을 닥치게 하기 위해 실존주의 철학을 설파한 것이 아닌가 오해하곤 했다.      


 우연과 신비가 만들어낸 엄청난 확률을 뚫고 우리는 이 세상에 떨어졌다. 일단 존재는 했으니 그다음으로는 본질을 찾아가야 하는데 어쩐지 잘못 배달된 택배 상자처럼 전혀 엉뚱한 곳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저기, 실례지만 여기가 확실한가요? 아무래도 제 본질은 101호가 아니라 102호인 것 같은데요?”      


 제 코가 석 자인, 시쳇말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어긋난 경첩처럼 삐그덕 거리는 내 존재의 기척에 귀 기울일 사람은 없다. 한밤중에 영문도 모른 채 실려 왔더라도 오배송의 책임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베개에 머리를 묻고 매끈한 어둠의 표면을 각막으로 훑으며 속으로만 외치는 것이다.   

   

 ‘대관절, 내가 어쩌다?’     




 내게 소설은 꿈의 목록에 없었다.(난 사실 희곡을 제일 좋아했다.) 엷고 얕고 넓게 직업의 세계를 탐방하며 다양한 장래희망을 거쳤다. 잔재주는 많았지만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재능이랄 게 없었다. 뱁새처럼 종종거리며 정규교육을 간신히 마쳤다. 공부를 하기보단 혼자 살고 싶어 호기심과 두려움을 반씩 섞어 유학을 갔고 결과는 처참히 박살. 근근이 살다 정신을 차려보니 20대 후반이었고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 틈에서 소설을 전공하고 있었다. 재학 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졸업식장에서 아이가 우는 통에 나 혼자 졸업장을 받고 사진도 못 찍었다. 주 양육자가 되어 내 능력 범위 안에서 가능한 공모전에 되는대로 도전했다. 200번 정도 떨어지자 그 후론 오기로 글을 쓰게 됐다. 절망도 희망도 없이 그저 습관처럼.      


 거짓말처럼 첫 책이 나왔다. 책을 쓰기 전까지 솔직히 에세이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랐고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다. 책은 잘 팔리지 않고 있지만 고맙게도 글을 써주십사 하는 제안이 들어왔다.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 나는 팔자에도 없는 십 대 겨냥 로맨스 소설을 쓰게 됐다. 마감이 쓰는 사람만이 아니라 편집하는 사람에게도 옹졸할 정도로 타이트해 자주 밤을 새웠다. 피곤에 찌들어 마른 세수를 하면서도 내가 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활력을 얻었다. 이번에 새로이 받은 청탁은 무려 아동용 SF…….     


 인생이 이렇다. 미끄러지고 도달하길 반복하며 어느 틈에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고 마는 것. 그리하여 내 묘비명은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로 정했다. 물론 난 땅에 묻히는 일은 없겠지만.     




 사르트르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기투(企投)는 존재라고. 거칠게 말해 자유와 선택의 책임을 지며 자신을 미래로 내던져 존재를 확보하는 것. 계획대로 왔든 어쩌다 흘러왔든 우리는 지금 각자의 여기에 있다.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박수 쳐 주고 싶다, 거듭되는 불안을 달래며 어찌어찌 흘러온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든, 일단 왔다는 것은 뭐라도 했다는 증거겠지.     


 “세상이 나를 던졌어? 그럼 나는 내가 원하는 곳을 향해 던져지겠어.”    

 

 여기까지 오느라 열심히 몸부림쳤을 우리를 위해 오늘은 일단 푹 자도록 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밝을 테고 구시렁대면서도 내일의 몫을 위해 기똥차게 달려갈 우리를 아니까. 오늘의 꿀잠이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갈 도움닫기가 되길 바라며.      


 그럼 모두-각자 원하는 시간에, 안락한 장소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혹은 자유로이 홀로, 제일 편한 자세를 하고서-안녕히 주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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