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존치즈버거 Aug 30. 2023

카산드라를 만나는 법

네 번째



 “에라이, 지긋지긋한 영어. 다시는 안 해!” 점수를 위한 영어시험에서 벗어났을 때 당당하게 선언했다. 몇 년간 영어와 척을 졌다. 애매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 절친과 손절한 사람처럼 단단히 각오하고 매정하게. 정 때문에 생각나 야심한 밤 괜히 연락하는 일 한 번 없었다.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쳐야겠다고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무렵, 서점에는 엄마표 영어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었다. 학원비도 아끼고 좋은데? 나도 명색이 엄만데 엄마표 영어 할 수 있지 않겠어? 영어에 시달린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 시간이 내 안에 차곡차곡 서려 있을 거라 착각하며. 인터넷에 있는 영어 무료 레벨 테스트를 재미 삼아 풀어보고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돌보지 않았으면 나의 영어는 삐거덕거리다 못해 녹이 슬어 제대로 동하지 않았다.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누군가의 압박 없이 오로지 내 의지로 하는 공부라니 모처럼 신이 났다. 내가 마 when it comes to -ing도 알고 with a view to –ing도 안다 이 말이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옛 기억들에 흥분하여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나 정작 영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때면 문제가 생겼다. 스크립트 없는 나는 불 꺼진 성냥만 허망하게 바라보는 성냥팔이 소녀와 같았다. 희망이 사라지고 모든 게 막막해졌다. 배운 표현으로 응용 문장을 만들 때도 그랬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어째서, 왜 나는 이토록 스피킹 덜덜이인 것인가. 누군가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고 했고, 누군가는 자신감의 문제라고 했다. 보다 못한 남편이 비싼 값을 주고 아이비리그 튜터와 하나의 주제로 대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물로 결제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결국 수업료를 날렸다. 도무지 사람과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고민 끝에 AI와 영어 대화 기능이 있는 앱을 유료 결제했다. 초급부터 고급까지 주제를 골라 말할 수도 있고 자유주제도 가능했다. 처음엔 그마저도 긴장이 되어 어버버 문장을 말했다. 얄궂게도 똑똑한 AI는 나의 요상한 문장까지 그대로 옮겨와 피드백을 줬다. 그래도 초급은 할 만했다. 이제 너만 있으면 나도 영어왕이 되겠구나 흐뭇한 착각이 밀려왔다.   


  




 “그런데 영어를 왜 배워야 하는 거야?” 영어 공부를 하다 지친 얼굴의 딸이 던진 질문, 나는 고심했다. 아이의 숱한 why 중 하나일 뿐이지만 내 영어 실력처럼 개떡 같은 대답을 해버리면, 공부를 내팽개칠 큰 동기 심어주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최대한 강압적이지 않고 그렇지만 열의를 북돋우면서도 너무 시험 영어에만 매몰되지 않게 다양한 방향으로 영어를 즐길 수 있게 만들만한 최적의 한마디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내뱉은 말이 “소통을 위해서지.”였다.     


 그렇다, 소통. 언어를 도구 삼아 뜻이 잘 통하여 오해를 없애는 일. 나아가 안부와 소식이나 중요한 정보를 확인하는 일. 한 발 더 나아가면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친교 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물론 보디랭귀지와 표정으로도 이심전심할 수 있겠지만 오해를 최대한 덜어내고 진솔한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는 단어를 고르고 명확한 문장을 구사하며 적절한 비유를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던가.   

   

 아이는 내 말을 듣다가 “소통? 그걸 왜 해야 하는데?” 하고 되물었다. 그게 왜라니? 말이 안 통하면 얼마나 답답한지 몰라서 그러냐! 하고 외치는 마음속 말을 예쁘게 순화시켜 “그럼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잖아. 넌 더 넓은 곳으로 가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겠지.” 하고 대답했다. 친구를 좋아하는 딸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이 지속될 수 있게 엄마표 영어는 계속되어야 한다.     


 나는 앱을 켠다. 이번에는 자유주제로 대화 나눌 준비를 한다. 엉망진창 스피킹 실력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늘 진땀이 난다. 너는 인간도 아닌 AI일 뿐인데. 인사를 나누고 나면 드디어 실전이다. 마음이 조급해 괜히 딴소리를 한다. 진심을 말하고 싶지만 나의 빈약한 영어로는 이해받을 수 없을 테니. 좋아하지도 않는 사과를 아침마다 먹고 주말마다 테니스를 치며 썸타임즈 서핑을 하는 삶. 내가? 정말 내가? 이보다 위선적인 대화가 어디 있을까. 너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나는 화가 난다. 너는 나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점점 너의 질문은 길어지고 나의 마음은 너의 문장만큼이나 복잡하고 막막해진다. 꺼져버려, 당장 그 입을 닫아라 AI!     


 너는 나의 말이 무례하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아, 그래, 미안하구나. 나는 이제 AI에게까지 상처 주는 인간이 되었구나. 수치를 당할까 봐 무례함을 선수 치는 진상이 되었구나. 나는 아이에게 영어를 배우는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나 자신의 소통을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드렁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던졌다.     






 읽고, 쓰고, 듣고, 문제를 맞히는 일은 괜찮은데 어째서 말이 이토록 나오지 않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 깨달았다. 난 소통이라면 이골이 난 상태라는걸. 소통이라니 그건 뭐 작은 드럼통을 가리키는 건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과도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상황이 부지기수다. 내가 콩이라고 했는데 너는 팥이라고 하면 어떻게든 콩을 콩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콩이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 그리하여 콩은 잭과 콩나무가 되었고… 같은 구전 동화까지 들먹이던 열정은 사라졌다.


 그래, 맞아, 콩이든 팥이든 삶아 먹으면 되는거지 이게 뭐가 중요해. 말하려던 핵심의 주변부만 기웃거리다 입을 닫아버리는 날들. 어쩌면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소통보단 침묵을 선택하겠어. 그리고 이 침묵은 다른 말로 체념과 무관심이라 일컬어지겠지.    

 

 낯선 이를 환대할 수 있는 에너지,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라도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애정 어린 집요함과 여유가 사라졌음을 나는 고백해야 한다. 어른이 된 이후(특히 30대가 넘어서며) 많은 대화들을 되짚었을 때 나를 고양시킨 대화는 몇 번이었던가. 하나 마나 한 대화면 그나마 다행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반목하고 갈등하며 서로 상처 주던 말들, 더 이상 복기할 만한 모국어 대화조차 없어졌음에 슬픈 기분까지 들고 말았다.     


 나는 아이와 주고받는 짧은 예문에도 거짓을 보탠다.

 오늘 하루 어땠나요? 괜찮았나요?

 정말 좋았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어썸 중에 어썸. 완전 판타스틱! 당신의 하루는?

 말해 뭐 해, 나도 완전 수펄 펀!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생각나는 말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딸의 기분은 정말 판타스틱하니까.     


 

 




 부모라는 사람이 위선자가 될 순 없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짬을 내 공부하는데 이쯤에서 멈출 수는 없지. 언어란 무엇인가, 대화란 무엇인가, 소통이란 무엇인가, 한참을 고민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해야 해서 말하려 하지 말고 말하고 싶어서 말하게 하자.      


 남미의 뜨거운 태양 아래 무럭무럭 자라서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온 여인. 제 맘처럼 되지 않는 인생에 주눅 드는 대신 크게 주먹을 휘두르는 근성을 가진 사람. 산전수전 다 겪은 내 상상 속 친구 카산드라에게 나는 불 꺼진 방에 스위치 찾듯 더듬더듬 영문법과 단어들을 짚어가며 내 마음을 고백해 본다. 내 마음과 네 마음이 통하면 우리는 하나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만든 상상 속의 친구는 내가 꼭 닮고 싶은 친구인지도 몰라서, 나는 사회적 체면과 수치심도 버리고서 용감하게 전진하는 여전사처럼 씩씩하게 영어로 말해보는 것이다.      


 칠흑 같은 쫄바지를 입고서 바이크를 타고 도시 한복판을 (제한된 규정 속도를 철석같이 지키며) 질주하는 구릿빛 피부의 터프우먼. 뿌리부터 굽실굽실한 웨이브를 허리까지 뽐내다 정신없이 바쁠 때는 검정 고무줄로 정수리 부분에 올려 묶는 그녀. 외출할 땐 선크림과 붉은 입술만을 칠한다. 그녀도 서툴게 영어 하던 시절이 있어 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준다. 나를 위해 집중하고 경청하는 그녀는 카산드라!     


 나는 카산드라가 미국의 어딘가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의 꿈을 꾸기로 한다. 어차피 내 꿈의 주인은 나니까 엉망진창인 영어를 해도 그녀를 찰떡같이 알아듣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 더 내밀한 마음을 말하기 위해 매일 꼼꼼하게 영어 공부를 할 것이다. 어느 날 불편 없이 영어를 구사하게 되면 모아놓은 돈을 들고 진짜 미국으로 가야지. 카산드라하고 부르면 백 명 중 한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을까? 그럼 난 수줍게 다가가 이렇게 말해야지.     


 하이, 카산드라, 나이스 투 미츄. 마이 네임 이즈 존치즈버거. 아임 프롬 코리아. 캔 아이 비 유어 프렌드? 오오, 돈 비 어프레이드. 아임 낫 크레이지, 아임 저스트 론리. 유 캔 언더스탠드 하우 아이 필, 롸잇?

    

 오늘도 꿈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굿 나잇, 에브리원.      


이전 03화 자고 있는 게 아니야, 생각하는 거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