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사람들에 관해 생각한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 중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나는 생각한다. 자주 상처받고 종종 진저리를 치고 늘 답답해하면서도 나는 왜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
사람을 생각할 때면, 나는 내가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물질처럼 느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 그 각양각색의 우주 속에 나라는 물질이 닿아 만들어 내는 반응도 결과도 가지각색이다. 요즘은 그걸 줄여 케미라고 말하지 않나. 나와 케미가 맞는 친구들은 대부분 나와 정반대다. 믿음을 인정하고 사랑이 많고 낙관적이다. 그들을 만날 때 섞이기보다는 새로운 세계로 외출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그런 이유다. 갖은 애를 써도 케미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는 관계도 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점액질의 액체 괴물이 되어 영락없이 미끄러지고 만다.
“너는 완고하지.” 나는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친구는 반듯하게 쓴 글씨처럼 또박또박 “너는 아주 완고해.” 하고 다시 말했다. 거기엔 우리 둘밖에 없었고 친구는 너라고 했으니 거기서 너란 당연히 나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 순간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뚱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마치 아주 완고한 사람처럼.
나에게 완고하다는 것은 뭐랄까,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 3대째 아이비리그 영문과 교수를 지내는 백인 남성의 프로필 이미지 같은 느낌을 주는 단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완고한 적이 없다. 융통성 없고 고집불통의 면이 있긴 하지만 그걸 남들에게 드러내 놓을 만큼의 용기는 없는 편이다. 오히려 여기저기서 무르단 소리를 듣고 자랐다. 번잡한 도시 속에 길을 잃고 ‘이봐요, 젊은이! 농협은행 어디예요?’ 하고 묻고 싶으면 늘 1순위로 지목되는 부류의 젊은이가 바로 나다.
그럼에도 친구는 나를 완고하다고, 매우 완고하게 말했고 그날 이후부터 나는 완고함이라는 단어와 나라는 인간의 완고한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언니는 꼭 청교도인처럼 옷을 입어.”라는 말과 함께. 그 말들은 불쾌함이나 편견 없이 그저 그 문장 자체로 내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주석을 들여다보는 기분, 나는 청교도인처럼 옷을 입는 완고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10대와 20대에는 참 많이도 그런 말을 했다.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알아?” 나는 확고한 나의 세계를 믿었고 그만큼이나 명확한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특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보는 나만을 인정했고 그것이 나라는 인간의 정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저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도대체 당신이 나에 대해 무얼 아냐고. 하지만 세월을 조금씩 덧대가며 나는 더 이상 이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늘 스스로를 배반했다. 그리하여 당신이 나에 대해 무엇을 아냐는 추궁 대신 요즘의 나는 “당신에게는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를 더 많이 말한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보고 싶다면 그건 당신의 자유인 것이다. 그 관점이 나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굳이 해명하려 들지 않는다. 사람은 너무 복잡하니까. 내가 언제든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언제든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도 될 수 있다고. 다른 점이 틀린 점은 아니기에 나는 더 이상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연연하지 않는다 해도 상처는 받지만 불필요한 짐 하나를 덜어낸 기분이 들어 회복이 조금 더 빨라졌다.
다만 친구가 내린 평가에 대해서는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나를 오래 보아 온 사람의 영문 모를 말이기에. 우선, 나는 그녀 앞에선 거침이 없다. 그만큼 편하고 익숙한 관계니까.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가 상냥하고 따스한 것에 비례해 합리적이고 뛰어난 판단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와는 대화 주제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 제일 좋다. 그녀는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어느 정도 사회적 기술이 들어간 면도 보인다-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와 있을 때면 나는 사적인 생활에서부터 사회의 부조리가 내게 끼치는 극심한 영향까지 전부 털어놓게 된다.
그러니까 나의 완고함은 아마도 사회 저변에 대한 무언가를 말할 때 드러나는 원칙주의자의 면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를 그르칠까 봐 마음속에만 가두었던 말들이 그녀 앞에서는 이리저리 날뛰는 것이다. 솜씨 좋게 나의 완고함을 포착한 그녀는 기어이 내게 완고함을 말했다.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어딘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는 듯 시원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그게 어쩐지 좋았다.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나의 어떤 면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이. 당신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말았지.
한때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에 외따로 떨어져 사는 꿈을 꾸었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삶을 강렬히 염원한 적도 있다. 그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기적에 가까운 명작을 썼다는 이유보다도 평생을 은둔한 그 삶의 정적이 탐났기 때문에. 나는 돌멩이를 꿈꾸고 순두부를 꿈꾸었다. 발에 차여도 자유로이 구르는 삶,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삽시간에 태어났다 사라지는 삶. 하지만 나는 기어이 다시 사랑에 빠졌다. 지리멸렬의 불가마를 통과할수록 단단해지는 마음. 저 혼자 살아온 것처럼 구는구나, 온통 사람이 빚어낸 결과물이 지금의 나인데. 광활한 우주를 먼지처럼 떠돌다 인간이라는 중력에 금세 포획되고 마는 작은 위성처럼, 나는 늘 당신들의 빛에 빚지는 존재로 살면서.
-보고 싶어!
난데없는 폭우처럼 과거의 추억에 젖어 감응하는 밤, 나는 상대의 안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제멋대로인 구석도 있다. 한 계절을 아무런 기척도 없이 흘려보낸 뒤에 문득 내민 인사에 적잖이 당황할 법도 한데 그럴 때마다 언제고 “나도 보고 싶어!”라고 대답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들뜨는 밤. 나는 이것이 <당장 OO 해야 하는 사람들의 10가지 특징>처럼 우리 마음을 단정 지어 법칙을 생산하는 글보다 더 명확하게 읽힌다. 명쾌한 사랑이 다가오는 순간 사람을 생각하며 물질이던 내가 비로소 사람이 된다.
오늘 밤은 다행히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잠에 들겠네. 당신의 온기로 지은 이불 한 채 덮고서. 내일 밤은 어떨지 모르지. 말끄러미 당신 생각하다가 찐득하게 이불속에 녹아내릴지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