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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레모스 Feb 04. 2024

일과 거리두기

“당신, 일과 얼마나 가까이 있나요?”

1.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모두에게 참 익숙하고 흔한 말이 된 것도 잠시, 사람들은 다시 모이고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거리 두기가 힘겨우면서도 그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사회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되며 이제는 재택근무, 배달음식 등이 친숙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여는 트렌드로 변화를 지속해가고 있습니다.


2. 코로나 거리 두기를 “일”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직장인들에게 일이란 건 코로나만큼 강력한 전파력과 중독성은 가지고 있습니다.(물론 일을 좋아하고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과 열정이 있다는 전제 조건하에) 분명 회사와 계약한 근로시간은 아침 9시-오후 6시까지 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퇴근 이후에도 쉬지 못하며 끊임없이 일에 대해 생각합니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고, 끝없이 야근이나 주말 잔업을 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때로는 강요에 의해, 때로는 자발적으로, 종종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일하며 직장인들은 일에 동료들과 함께 파묻히고 중독되어 갑니다. 사장님들이 원하는 ‘주인의식’이 과잉 탑재되어 분명 자신의 회사가 아닌데, 자신의 회사처럼 걱정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3. 그래서 일과 사람과의 관계에도 1,2,3 등의 단계적 거리두기 시행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저는 해봤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당신은 “일과 얼마나 가까이 있나요?”


4. 요즘 저는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 지인들께 “일과 거리두기 중입니다”라고 답하곤 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보통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찰싹 붙어 도통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N극과 S극처럼 일과 나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져 있는 걸 느낍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말하자면 3단계의 강력한 거리 두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기왕 가까워졌다면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찰싹” 소리를 내며 붙는 소리처럼 시원하고 빈틈없는 관계가 되어 성과도 나고, 신바람 나게 일하면 참 좋을 텐데 돌이켜 보면 저는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일과의 관계(the relationship between me and the work)는 N극과 S극이 되었다가 다음엔 S극과 S극의 관계가 되는 등, 서로 밀고 당기고를 반복하는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좀 지칩니다. 저는 자석이 아니고 사람이다 보니 이런 힘이 주는 묘한 긴장감을 자주 느끼며 괴롭고 답답해질 때도 많습니다.

일을 잘하려고 애를 쓰는데 오히려 나의 노력과 달리 우리의 관계는 어긋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거죠.


5. 그게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거나 일이 잘 안 풀리는 일이 잦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아, 일과 자발적인 거리 두기가 필요한 시기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는다거나 정성을 쏟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마치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레이업슛을 배울 때 링에 공을 ‘놓고 온다’(두고 온다) 같은 느낌입니다.


6. 슬램덩크를 모를만한 분들을 위해 간략한 설명을 덧붙이려 합니다.

농구만화 슬램덩크는 제가 어릴 적 오빠를 따라 방구석에서 뒹굴며 정독했던 만화이고 최근에 영화로 상영되기도 해 다시 주목을 받았습니다.

슬램덩크의 주인공인 강백호는 금사빠인 데다 무대포로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는 빨강머리에 체격이 건장한 건달에 가깝습니다. 그러던 중, 친절하면서도 농구를 좋아하는 채소연의 영향으로 단순하게 농구를 시작했다가 어느덧 농구에 진심이 되어버리는 그런 일본 스포츠만화입니다.


7. 제가 말하는 강백호의 레이업슛은 이런 배경에서 출발합니다.

농구공을 만져보지도 않은 초짜 주제에 ‘농구천재’ 강백호라고 스스로를 부르지 않나, 타고난 체격을 믿으며 겁 없이 덤비거나 하는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떵떵거리는 자신감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과대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실력상 상대도 안되면서도 혼자만 라이벌로 인식하는 서태웅에게 레이업슛(풋내기슛이라고 부름) 넣지 못한다며 놀림을 받은 강백호는 자존심이 상해 혼자 새벽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그걸 알게 된 짝사랑 상대 채소연이 백호의 농구 연습을 도와주며 레이업슛은 완성되어 갑니다. 이때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해준 짧지만 굵은 조언이 바로 “공을 놓고 온다는 느낌으로” 슛을 해보라고 말이죠.

 

8. 저는 이 말을 힘을 빼라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연습을 많이 했으니 자신을 믿어라. 최선을 다하되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결과는 맡긴다.

내 통제 밖의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두고 오는 것입니다.(퇴근 후, 일 생각과 책임을, 또 결과를 집에 가져오지 않고 랩탑을 닫는 그 순간 거기에 두고 오자는 겁니다.)

운동이나 악기를 배우다 보면 힘을 빼라는 조언을 종종 듣는데 이 또한 비슷한 맥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9. 강백호는 이렇게 놓고 오는 힘으로 실전 경기에서 레이업 슛에 성공합니다.

그러고서도 역시 난 농구천재라며 으스대는 게 그의 유쾌함이자 장점인데요 그런 강백호의 여유와 배짱이 부럽기도 한 요즘입니다. 그래서 슬램덩크 전권을 생일선물로 선물 받아 방 한 켠에 전시(?) 중이네요.  


10. 어쨌거나 1달 휴직은 저에게 그간의 직장 생활 중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가장 강력한 거리 두기를 선물해 줄 거라 믿습니다.

오늘로 3일 차인데, 회사 이메일과 슬랙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참는 게 너무 힘듭니다. 하지만, 손가락을 부러뜨리겠다는 심정으로 확인하지 않고 나의 오늘, 지금에 무척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일은 저 멀리, 어딘가에 두고 온 농구공입니다. 1달 뒤에는 그 농구공을 다시 들고 게임에 임할 태세를 갖추겠지요.

그때는 강백호처럼 이렇게 으스대보기도 하고 주변을 유쾌하게(때론 어이없게) 만들어 보고 싶기도 합니다.

물론 저만의 레이업 슛 성공도 하고요.


11.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일과 어느 정도의 거리 두기를 유지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는 일과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는 분도 아니, 더 멀어져야 하는 분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 “거리 두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고통스럽고 지난했던 코로나를 이겨내게 한 비결이 된 만큼, 우리에게도 일에서 오던 무언가를 이겨나가게 하고 더 나은 웰빙을 누리게 하는 지렛대가 되어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두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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