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 가, 제발
1. 3년 전, 지금 회사로 이직할 때 나의 다짐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Nine to Six, 하루 딱 8시간만 일하자.”
2. 개인사업자 신분이기도 했고 주 업무가 영업이기도 했던 전 회사에서 새벽부터 일하고 밤 10시면 다시 랩탑을 열고 일했던 삶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래야만 나도 모르게 나를 덮친 이 번아웃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죠.
무엇보다, 내가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하는 나에게 스스로가 직장인이라는 걸 세뇌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하루 8시간이라는 근무시간 지키기라고 봤습니다. 시간이야말로 고용된 존재가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중요한 지표이기 때문이죠.
8시간을 넘겨 일하고 싶어질 때마다 혹은 그래야 하는 상황이 올 때마다 저는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일할 기회가 있는 이 회사는 소중하지만 이 회사는 ‘네 회사’가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하라고’
때로는 야근과 힘겨운 업무에 시달리는 동료에게도.
3. 입사 첫 해에는 얼추 잘 됐던 거 같아요.
코로나로 재택근무도 많이 했고, 내가 맡은 팀이 있는 것도 아니라, 외국 매니저에게 보고하며 한국에서 내 일만 잘하면 되어서 어찌어찌 하루 8시간 내에서 업무를 마무리하려 했어요.
4. 쓰면서도 제 말이 참 어이없고 우습게 느껴집니다.
하루 8시간을 일하겠다고 계약했고 그렇게 일하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나는 왜 ”하루 8시간만 일하려고“ 노력을 기울여야 초과근무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건지 말이죠.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일을 왜 하루 8시간 이상 해왔을까? (몇 해 정도는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게 기본이었으니)
- 일이 재미있어서요.
- 조금만 더 하면 일이 끝날 거 같아서요.
- 일을 잘하고 성취하고 싶어서요.
- 일을 독촉하는 고객과 그 일을 해내고 싶은 나의 내면의 목소리 때문에요.
- 일을 잘 끝내니(?) 또 다른 일이 맡겨져서요.
- 일을 많이 하면 그게 표준이 되고 패턴이 되어 그냥 일을 많이 하는 게 당연해져서요.
5. 위에 적은 5가지 모두 해당됩니다. 다양한 이유 같지만, 결국은 일이 좋고 잘하고 싶어서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네요.
어찌 보면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을 좋아할 수 있고, 좋아해서 많이 하고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고 인정받는 환경에서 일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6. 하지만 전 회사를 떠나면서야 비로소 내가 지치고 번아웃이 왔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일을 아무리 좋아하고 잘해도 적정 수준을 넘어가면 반드시 탈이 난다는 걸 달리고 있을 때는 정말 알지 못했어요.
내가 예상하고 생각했던 것보다도 나의 번아웃은 꽤나 깊고도 커다래 이것을 메우고 충전해 가는데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재택근무를 하고 사람을 안 만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등 예전이라면 하지 않던 노력과 함께요.
7. 그렇다고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저는 알게 되었어요.
지금 회사로 이직 후 2년 차부터 다시 팀을 맡고 신생부서를 맡게 된 저는 어느 순간 다시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벌이고, 속도를 내고,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하겠다고 지르고.
8. 그러다 마주한 내 모습이 이거였습니다.
“6시가 넘어도 랩탑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미 업무 시간이 지났으니, 랩탑을 닫으라는 뇌의 경고는 잊고 여기까지만 더 하겠다는 마음으로 자꾸 업무를 해나갑니다.
그러다 이제 덮어야지, 생각하면 어디선가 이메일이나 슬랙 메세지가 띠링하고 날아옵니다.
그럼 다시 쳇바퀴 돌듯 끝나지 않는 업무가 이어집니다.“
9. 이때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실 그 즉시 랩탑을 덮고 오늘 할 일(혹은 남은 일, 혹은 반드시 지금 끝내지 않아도 되는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결단입니다.
그러니 제게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게 회사나 상사라기보다는(물론 그럴 때도 무수히 많지만)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 일 때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 이 일을 오늘 안에 끝내고 싶은 욕구, 혹은 이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은 갈증말이죠.
10. 진짜 문제는 복잡한 비즈니스 상황이나 골치 아픈 업무 상황에서 야근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업무를 6시에 마무리하든 8시에 마무리하든에 상관없이 잠들기 전까지 일 생각이 머리에 맴돕니다.
자기 전이라는 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예 이 일이라는 녀석은 저의 잠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누워 있어도 일 생각이 나고, 책을 읽어도 일 생각이 납니다. 일 생각 그만해, 이런 마음으로 추운 겨울 산책을 나가도 일 생각은 찰거머리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돕니다.
11. 여기서 일이라는 건 일 그 자체도 있지만, 그와 관련된 사람도 포함됩니다.
일이 잘 안 풀리기 때문에 생각이 자꾸 나는 거고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고민하고, 그러다 보면 이 일을 도와주지 않거나, 혹은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누군가에 대한 감정도 같이 올라옵니다. 대상은 상황마다 다양합니다. 팀원, 동료, 매니저, 고객 어쩔 땐 나 자신이 제일 마음에 안 들기도 하죠. 온갖 감정과 상념에 머리와 가슴이 다 엉망입니다.
이러니 잠이 올리가 없습니다. 잘 수도 없고 생각을 멈출 수도 없는 마비된 거 같은 상태인 거죠.
12. 잠을 자려고 별짓을 다해봅니다. 인터넷 쇼핑을 하고 밀리의 서재도 들춰보고 유튜브도 보고. 그래도 소용은 없습니다.
[데일카네기 행복론]이라는 책을 읽으면 불면증으로 죽은 사람은 없으며 오히려 불면증 그 자체보다는 불면하며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적혀 있습니다.
나 역시 잠을 못 자는 것 때문에 걱정이 되는 건 아니지만, 나의 고유한 삶의 시간을 이렇게 고스란히 일에게 다시 내어준 나 자신에게도 나를 이렇게 만든(?) 일과 사람과 회사에게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13. 이런 날이 며칠만 반복돼도 잠을 잘 못 자고 일은 일대로 많이 하니 피폐해지는데 몇 달이 지속되면 정말 많이 괴로워집니다.
토요일엔 KO패를 당한 선수처럼 이불속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그로기 상태로 주말을 날려 버리기도 하지요.
그러다 번뜩 정신이 듭니다. 아 내가 또 이러고 있네. 8시간이 웬 말이냐, 삶이 일에 압도당해 있잖아.
14. 일, 너 “제발 저리 가.”
좋은데 싫어. 좀 적당히 해.
14. 그럼 해결책은 뭘까요?
- 다시 일을 적게 하는 것입니다.
- 일에서 일어나는 복잡함들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입니다.
- Switch on/off를 잘하는 것입니다.
15. 그렇게 나는 1달 휴직을 결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