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레모스 Feb 19. 2024

번아웃을 또 겪을 수는 없다.

달렸지만 달리지 않는다.

1. 휴직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후회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재난이나 위기의 순간에도 ‘골든타임’이 있듯이, 제 인생에도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한 골든타임이 있다고 믿었거든요. 위험 신호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거나 피하지 않고 잘 받아들여 취하는 것, 그 선택이 제 휴직의 근거가 되어주었습니다.


2. 제 삶에 찾아온 ‘위험 신호’는 흔히 말하는 번아웃 직전의 증상이었어요.

일을 좋아하는 제가 일을 하는 게 즐겁지 않고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주말에는 놀 에너지도 없어 쓰러져 있는 일상이 반복되기 시작한 거죠.

3년 전 겪었던 혹은 그때와 양상은 다르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운에서 빨간불이 켜지는 걸 감지했습니다. 3년 전 번아웃을 다 해결하지도 못한 거 같은데, 또 다른 번아웃이 온다고?

“번아웃을 또 겪을 순 없지.”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만큼 지난하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으니까요.


3. 그런데 막상 제가 번아웃이었어요, 혹은 지금 번아웃 직전이에요라고 말하려고 하니, “번아웃이 정말 뭘까?” “어떻게 생긴 단어일까?”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가?” 이런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검색도 해보고 관련된 책도 읽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저는 그 과정에서 답을 얻기보단 약간 미로에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4. 그래서 일단 번아웃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유래를 살펴 보았습니다. 한경 경제용어사전에서는 번아웃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 번아웃(burnout): 다 불타서 없어진다

- 번아웃이라는 말은 1974년 미국 뉴욕의 의사 허버트 프러이덴버거가 병원 의료진들이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쳐있는 모습을 보고 처음 사용했다. 심지까지 몽땅 타버려 불이 붙지 않는 상태를 묘사한 말이다.

-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이로 인해 무기력증,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증상을 말한다. `연소 증후군', 혹은 `탈진 증후군'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의학적으로는 코르티솔 호르몬(스트레스에 대항해 신체를 방어하는 호르몬) 고갈 현상이다. 다 타버린 양초처럼 신체의 코르티솔 호르몬이 모두 소진되면 정상적 생활이 멈춘다.


5. 이쯤 되면 번아웃의 이미지가 궁금해지지 않나요? 그래서 저도 구글이미지에서 ‘burnout’이라고 검색을 해보니 정말 다양한 사진이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제가 느끼는 번아웃을 정말 잘 표현하고 생각되는 2장의 이미지를 이곳에 공유해 봅니다.

어느 쪽이 조금 더 와닿나요? 저는 오른쪽인 거 같아요. 특히 배터리 상태가 많이 와닿습니다. 0%는 아닌데, 충전이 필요하다고 알려주는 ‘빨간색 경고 표시‘처럼 지쳐있는 상태 말이죠.


[왼쪽] prevention.com

[오른쪽] range.co


6. 검색을 하다 보니, 번아웃을 자가진단 해볼 수 있는 문항이 이곳저곳에 꽤 많이 있었습니다. 약간씩 다르지만, 대부분 비슷한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공신력 있어 보이는 2015년에 안전관리공단에서 발표한 번아웃 자가진단 문항을 가져와 봤습니다.

문항은 총 17개이며 각 문항에 대해 1-5점 척도로 답하면 됩니다.


1) 쉽게 피로를 느낀다

 2) 하루가 끝나면 녹초가 된다

 3) 아파 보인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4) 일이 재미없다

 5)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다

 6) 이유없이 슬프다

 7)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

 8) 짜증이 늘었다

 9) 화를 참을 수 없다

 10)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느낀다

 11)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12) 여가 생활을 즐기지 못한다

 13) 만성 피로, 두통, 소화 불량이 늘었다

 14) 자주 한계를 느낀다

 15) 대체로 모든 일에 의욕이 없다

 16) 유머 감각이 사라졌다

 17)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힘들게 느껴진다

 

전혀 아니다 : 1점

약간 그렇다 : 2점

그냥 그렇다 : 3점

많이 그렇다 : 4점

아주 그렇다 : 5점


한 번 답변해 보시겠어요?

몇 점이 나왔나요? 총점수가 65점 이상이라면, 번 아웃 증후군이 의심된다고 합니다.

저는 65점에는 한참 못 미치는 45점이 나와서, 살짝 당황했습니다. 어? 나 번아웃이 아닌 건가?


7. 돌이켜보니, 3년 전 어느 날 집에 누가 보냈는지 모르겠는 택배가 도착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인드웨이라는 곳에서 만든 ‘마음 챙김’에 관한 워크북과 키트가 담겨 있어 저를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보냈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직전 회사 팀원이자 후배인 S가 제 생각이 나 보내줬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도움을 받아야겠다 하고 열어서 열심히 워크북의 여정을 따라가려는데 무언가 삐걱거립니다. 이상하게 이 책의 내용이 저랑 잘 맞지 않는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책에서 표현하는 것만큼 ‘아무것도 못할 만큼 지치거나 무기력해지지 않았다’였습니다.


8. 네 맞아요, 나는 지쳤고 쉼이 필요했지만, 아무것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무언가 하고 싶다는 열망은 마음속에 늘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나의 열망을 감당할 에너지가 부족했다가 더 맞는 거 같아요. 혹은 열망이 사그라들거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괴롭고 그래서 기운이 빠졌다가 더 맞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9. 이런 나의 상태에 대해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규정하고 싶었습니다. 번아웃에 대한 다양한 기사의 수만큼,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있었는데 그중 몇 가지 와닿는 기사를 공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로 책임감이 높고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생긴 증상이다.

40년 동안 번아웃을 연구한 크리스티나 마슬락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심리학과 교수는 번아웃 유발 요인을 6가지로 정리했다.

과다한 업무

업무 통제력 상실

보상이 적거나 없음

동료와의 관계(소속감 없음)

불공정한 대우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업무 등이다.

(동아일보 “너무 열심히만 살아온 당신에게 찾아오는 불청객, 번아웃“, 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454011?sid=103)​​


- 번아웃은 열심히 일한다 해서 무조건 생기는 증상이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번아웃이 없는 사람도 있다. 원래 번아웃에 내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치를 부여한 일에 열정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일에 자신을 투입하고 스스로를 착취하면 번아웃이 온다. 그러니까 번아웃은 자기 소외 때문에 온다. 내가 나를 소외시키고, 나와의 소통을 끊어버리면 번아웃이 되는 것이다.

(세계일보, “번아웃, 나를 재배치하는 시간”,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3658403?sid=110)​​


- 지난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직업 관련 증상'으로 정의했다. 질병은 아니지만, 에너지가 소진돼 의욕이 없고 집중하기 어려우며 냉소적인 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에 돌봄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

(코메디닷컴, “2020년 일상을 잠식한 번아웃.. 어떻게 극복할까?“, https://n.news.naver.com/article/296/0000047868?sid=103)​​


위 기사의 내용이 지금의 저에게는 꽤 많이 와닿았습니다. 번아웃은 아닌데, 번아웃의 원인은 지금의 나를 잘 설명해주고 있더군요.


- 책임감이 높고: 제 저는 갤럽의 클리프턴 강점 진단에 의하면 상위 4번째 강점이 ‘책임’(Responsibility)라고 나올 만큼 책임감이 큰 사람입니다. 회사에서는 매니저를 해서 이 책임감이 더 커지고 새롭게 맡게 된 정부 취업 프로그램 덕분에 청년들에 대한 책임감까지 도맡는 스타일입니다.


- 너무 열심히 살아서: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정말 많이 열심히 산거 맞습니다. 어쩌면 나의 번아웃은 지난 몇 년이 아니라, 지나온 몇십 년에 대한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기간의 농도 짙은 지침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스며든 지침이어서 옅어 보이나 깊이 뿌리 박힌 녀석일 수도 있겠군요.


- 크리스티나 마슬락 교수가 설명한 이유 중 3가지: 6가지 중 3-4가지(업무 통제력 상실, 보상이 적거나 없음,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업무..?)가 현재의 나를 잘 묘사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Aha’를 불러올 만큼 일에서 느낀 무기력함의 이유를 대변해주고 있네요.


-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일에 자신을 투입하고 스스로를 착취하면 번아웃이 온다‘: 이 기사에서는 뜻하지 않는 위로와 공감을 얻었습니다. 나는 정말 가치중심적인 사람인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업무에서 갭이 발생해 내가 정말 나 자신을 착취했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 질병은 아니지만, 에너지가 소진돼 의욕이 없고 집중하기 어려우며 냉소적인 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에 돌봄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 결론만 보면, 나는 ‘자기 돌봄’을 위해 휴직을 결심했으니 이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픈 건 아니지만 돌봄이 필요하다라고.


10.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릴게요.

어느 날 전력질주를 해 경기에서 이겨야만 하는 경주마, 최고 속력으로 달려오기만 한 말에게 갑자기 경기가 중단되었다고 주인이 이야기했습니다.

맛있는 여물을 주며 이 참에 여유도 가지고 냇가에서 쉬기도 하라고 한 거죠. 경주마는 전력질주하지도 달리지도 않는 상태가 너무 어색하고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저는 더 달리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주인은 경주마에게 “너는 더 달릴 수도 없고 이제는 달릴 필요도 없으니 멈추라”고 말했습니다.

경주마는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달리지 않고 걸었습니다. 속도를 내거나 경쟁에 참여하던 삶은 서서히 잊으며, 한가롭게 풀을 뜯거나 홀로 사색하는 시간도 많아졌지요.

그러다 어느 날 주인이 다시 말에게 와서 이야기합니다. “이제 경주가 다시 재개될 거야. 넌 이제 달려도 돼.”

하지만, 경주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제 달릴 힘도 없어졌고, 무엇보다 이제는 달리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11. 코로나 이전, 코로나, 코로나 이후 나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어 처음에는 너무 답답하고 힘들었는데 멈춰 서고 보니, 그제야 달려가던 내가 힘들었다는 걸, 무척 지쳐있어 쉼이 필요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코로나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집에 1시간만 있어도 답답해하던 내가 집 안에 있는 걸 편안해하고 즐기기 시작했거든요. 사람들이 만나기 싫어져 만나지 않았어요. 만날 힘과 에너지가 사실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만나게 되더라도 그 시간이 좋은 게 아니라 오히려 에너지를 뺏기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오로지 가족과만 많은 시간을 보내고 혼자 산책하거나 걷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다이어트를 하거나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작게 말하고 적게 행동했습니다.


12. 번아웃에 대해 공부하다보니 이 세계는 제 예상보다 훨씬 크고 넓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보다 먼저 번아웃을 고민하고 연구하고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더군요. 지금 빠져들어 읽고 있는 [요즘 애들] 이라는 책에서는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기 아닌 체제/구조/사회의 문제라고까지 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이 내용으로는 다른 글에서 한번 더 다뤄봐야지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저 지금의 내가 번아웃 직전의 나를 2번 경험하며 깨달은 게 있다면 이 세가지인듯 해요.

1) 일을 하고 좋아하되 때론 적당히 해야 한다.

2) 나 자신을 갈아 넣지는 말아야 한다.

3)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는 일을 하자.


13. 나에게 1 달이라는 자기 돌봄의 시간을 허락한 나를 칭찬합니다.

잘했어.


이전 04화 9-6시로 끝나지 않는 일일일과 불면의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