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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레모스 Feb 25. 2024

휴직, 쿨하게 질렀어도 통장 잔고 앞에는 쫄리는 현실

자기 돌봄을 위한 ‘소액투자’

고민은 깊이 하되, 결정은 단호하게 행동은 신속하게 한다.


1. 어쩌면 제 인생의 모토일 수도 있겠습니다. 생각도 결정도 행동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꽤 빠른 편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진짜, 벌써 했다고?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 걸 보면요.


2. 휴직을 해야겠다는 고민을 한지는 사실 오래됐습니다.

근 15년을 넘게 일하면서 자녀 둘도 키웠고 서울 강남에서 경기북부까지 출퇴근을 하며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다는 게 느껴지긴 했거든요.

무엇보다 육아휴직이라는 좋은 제도를 잘 활용하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저걸 언제 써보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명분은 ‘육아휴직’이지만 속사정은 ‘나를 위해’ 쉬고 싶다였어요. 쉰다기보다는 뭐랄까,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죠.


3. 그런 고민이 소복소복 저변에 쌓여 있었기에, 아마도 이번 휴직을 결정하는 건 오히려 더 쉽고 단순했을 겁니다.

그래, 때는 지금이네, 쉬자.

계획했던 거보다 쉬는 기간이 너무 짧긴 한데, 그래도 쉬는 게 맞아.

나의 직관을 믿고 마음의 결정을 하고 매니저에게 통보(?)하고 휴직계를 내는 데 걸린 시간은 채 2주가 안 됩니다. (물론 의사결정을 한 후 실제 휴직을 시작하는 데까지는 약 1달의 시간이 있어 업무를 정리, 휴직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빠르게 결정하고 움직일 수 있는 회사의 시스템과 문화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도 저에겐 좋은 조건이고 감사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지르고 나니, 보이는 통장 잔고


4. 그런데 하필 지난 1월 10년 넘게 살던 집을 팔고 새로운 터전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특별히 새로운 가구나 가전을 사지 않아도 이사는 그 자체로 돈이 많이 드는 일이더군요.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고도 가족 대출을 감행했던 이사인지라 수중에 남은 돈이 정말 하나도 없었습니다. 원래 저는 현금유동성이 높은 사람이라, 가족들 사이에서는 농담 삼아 경스앤캐시라 불렸었는데 지금은 이번 달 생활비에 전전긍긍해야 했습니다.


5. 그래도 에라 모르겠다가 제 심정이었어요. 어찌 되겠지.

1월 29일에 월급이 들어오면 그걸로 2월로 버텨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이 글을 쓰는 오늘이 2월 22일이고 카페에 와서 4천 원짜리 바닐라 라떼를 한 잔 시켜 먹은 걸 보면 저는 아직 잘 버티고 있는 게 맞습니다. 물론 2월에도 2월 29일, 월급날을 기다린다는 현실은 매한가지이고요.

아, 물론 저의 휴직은 무급입니다.(회사 휴가 규정에 child care, unpaid라고 명확하게 적혀 있더군요) 나라에서 육아휴직비를 곧 소액 받게 되긴 하겠지만요.

29일에 들어올 돈은 직장인들의 꿈같은 제13월의 월급이라 불리는 연말정산 환급금입니다. 역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고요.

작년에 건강보험료를 정말 많이 낸 덕분일까요..? 3월 한 달을 그래도 버틸 수 있겠다 싶은 돈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1월에 영업 목표 달성한 커미션이 감사하게 2월에 입금된다고 하니, 만세를 부를 지경입니다.


6. 이쯤 되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휴직 = 돈‘이라는 깨달음이 온 겁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건 당연히 저뿐만이 아니고, 휴직을 혹은 쉼을 결정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육아휴직이라는 공식 제도를 쓸 수 있는 ‘부모’이기에 그나마도 전 휴직이 가능했습니다. (휴직 가는 저를 부러워하신 S차장님께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고용노동부의 고용보험 관련 내용을 찾아보니, 육아휴직의 경우는 최대 월 150만 원, 최소 월 70만 원의 지원금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 육아휴직 기간(1년 이내)에 대하여 통상임금의 100분의 80(상한액:월 150만 원, 하한액:월 70만 원)을 육아휴직 급여액으로 지급합니다. 단, 육아휴직급여액 중 일부(100분의 25)를 직장복귀 6개월 후에 합산하여 일시불로 지급합니다.
https://www.ei.go.kr/ei/eih/eg/pb/pbPersonBnef/retrievePb0302Info.do​​


휴직을 선택하는 부모들 중 맞벌이인 경우도 있겠지만, 육아휴직이니 최소 3인 이상 가족이 월 150만 원으로 생활비를 한다는 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정말 턱없이 말이 안 되는 현실입니다.

대한민국의 육아휴직 제도가 휴직의 기간면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뒤떨어지지 않지만, 휴직 기간 지원금은 상대적으로 무척 낮다는 기사도 있네요. 더 슬픈 건 실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비율이 대기업이나 고소득자에게서 높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만큼 휴직은 돈과 직결되어 있음을 반증해 주는 듯합니다.

다만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이 긴데도 불구하고 육아휴직을 실제로 사용하는 비율은 최하위 수준이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육아 페널티의 현실, 육아휴직 사용권 보장을 위한 개선 과제'(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출생아 100명당 육아휴직 사용자 비율은 여성 21.4명, 남성 1.3명으로 관련 정보가 공개된 OECD 19개 국가 중 가장 낮았다.

육아휴직 사용자는 대기업이나 고소득 직장인인 경우가 많았다. 통계청의 2021년 육아휴직 통계에 따르면 남성 육아휴직자의 71.0%, 여성 육아휴직자의 62.4%가 종사자 규모 300명 이상 대기업 소속이었다. 또 같은 해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육아휴직 소득대체율의 효과:남성 육아휴직 사용의 조건과 과제' 보고서를 보면 월 소득 300만 원 이상 근로자의 육아휴직 사용은 2015년 대비 2020년 2.55배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육아휴직을 사용한 월 210만 원 이하 소득자는 외려 19.2%나 감소했다.

보고서는 "육아휴직 사용이 초래하는 소득 손실이 저소득층 근로자일수록 더 크게 다가오는 만큼 육아휴직급여 하한액을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며 "육아휴직급여 재정의 일반회계 부담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https://www.asiae.co.kr/article/2023092416001826017

브런치에도 가장인데 어떻게 휴직을 하냐며 동료들이 놀랐다는 글, 휴직 기간 가정의 수익명세서를 올린 작가님 등이 보입니다. (그만큼 “Money Matters!”라는 뜻이겠지요.)

“오호라, 통제로다.”


1월 소액 투자 계획


7. 쉬는 동안 생활비가 없다고 이런저런 앓는 소리를 아무리 해봐도 고작 ‘1달’밖에 쉬지 않는 저는 1달의 시간 동안 ‘나를 위한 소액투자’를 결심했습니다.

돈은 정말 있다가도 없는 거니까, 돈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않지만, 돈에 얽매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숨만 쉬어도 돈을 내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럼 정말 소박한 제 투자 리스트 한번 같이 보시겠어요?


1) 동네 문화센터 등록

무슨 백화점 문화센터도 아닙니다. 구에서 운영하는 취미반에 2월 한 달만이라도 다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나마도 신청한 3개 강좌 중 우여곡절 끝에 결국 1개 강좌만 듣게 됩니다.

1달 수강료가 55,000원인데 난방기 고장으로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며 2월은 수강료의 반액을 환불해 주겠다며 문자가 왔습니다. 하늘도 제 휴직을 돕고 있는 거겠죠? 으하하


2) 나 홀로 여행 2회

한 달 살기를 가라, 해외여행을 이 기회에 가보면 어떻겠냐 등 휴직을 앞둔 저에게 온갖 제안이 쏟아졌습니다. 심지어 호주에 1년 가 있는 올케는 1달 동안 호주에 와 있어도 된다며 초대를 했습니다.

그러면 뭐 하나요. 지금의 나는 떠날 에너지도 의지도 소진한걸요.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대답하며 2월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다 2월을 정말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또 어떨 때 나는 충전이 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강원도 태백에서 2박 3일, 경기도 가평에서 2박 3일을 예약했습니다.

교통/숙박/식비 정도야 쓸 수 있지 않겠어요? 무엇보다 밥을 주는 숙소를 예약한 게 마음에 들었구요.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으로의 여행이어서 좋았습니다.

눈이 온 가평과 태백은 말 그대로 힐링이었어요.


3) 가족여행

막상 돈을 제일 부어야 하는 건 이 영역입니다. 일단 4인 기준이고, 각 사람의 니즈(?)를 충족시키다 보면 상당한 돈이 듭니다.

2박 3일로 복직과 개학을 앞둔 우리를 위로해 보아야죠 :)


4) 먹고 싶은 음식 사 먹기

저는 최근 회사 EAP(Employee Assistant Program)를 통해 심리 상담을 시작했고 1:1 코칭도 받고 있습니다.

상담사님과 코치님 모두 저에게 ‘해야만 하는’ 의무감과 책임감 말고 ‘하고 싶다’라는 욕구와 원하는 것을 2월엔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셨어요.

해야 하는 것으로 가득한 삶으로 인해 에너지가 많이 떨어져 있고, 그래서 ‘자기 돌봄’이 너무 안 되어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여기에 적은 소액투자 모두가 자기 돌봄을 위한 시작인데요, 그중에서도 아무거나 먹고 주는 대로 먹고 배고파서 먹는 제가 저를 잘 챙겨보겠다는 큰 다짐 중 하나가 내가 뭘 먹고 싶은지에 관심 갖고 먹고 싶은 걸 진짜 먹겠다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저에게는 큰 변화가 맞습니다.

마침 이사 온 동네는 맛집투성이네요. 없는 음식이 없을 정도입니다.


Life goes on


8. 네, 삶은 계속됩니다.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가고 지나가고 살아지기 마련입니다.

잠시 쉰다고 인생 망하지 않고, 통장에 잠시 잔고가 바닥나도, 우리 괜찮습니다.

내가 나를 믿어주는 자기 신뢰/자기 확신, 내가 나를 돌봐주는 자기 돌봄, 내가 나를 용인해 주는 자기 허용이 우리는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너 조금 더 질러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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