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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레모스 Feb 21. 2024

잠시 쉬어가도 인생 망하지 않는다.

It’s the anxiety, STUPID

1. Linkedin을 하다 보면 종종 휴직기를 갖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생각난 김에 링트인에 ‘휴직’이라는 단어로 글을 검색하니 여러 업데이트가 눈에 띕니다.

- 아내 혼자 갓 태어난 아이를 감당하는 걸 보며 육아휴직을 결심했다는 초보 아빠

- 휴직을 보장해 주는 회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LG에너지솔루션은 자녀 1명당 2년까지 휴직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휴직을 하며 자녀 사진을 올리는 분

- 건강상의 이유로 2달 휴직(동료들이 일에 ‘뼈를 갈아 넣었군요’라고 말했다는 글이 인상적)한다는 내용

- 휴직을 요구했더니 회사에서 퇴직으로 되갚았다는 글


위 결과가 나름 흥미로워 이번엔 ‘갭이어’라고 검색해 봅니다.

- 어느 분이 회사 면접 때 이력서에 갭이 있으면 꼭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적으셨네요. 그런 거 같아요. 저 역시도 공백기에 대한 질문을 누군가에게 무의식적으로 했던 거 같고요. 우리는 왜 나의 ‘공백’에 대해 설명해야/질문해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볼거리임이 분명합니다.

- 갭이어 동안(어쩔 수 없는 퇴직으로) 영어 공부를 했음

- 퇴사, 업의 방향성 탐색, 새로운 커리어 시작을 위한 시간 8개월 갖기

- 커리어갭이라는 단어도 등장, #직장인 #퇴사 #퇴사선배


출처 [왼쪽] https://thespartanforum.com/963/features/the-gap-year/

[오른쪽] https://www.stemjobs.com/gap-year/


이밖에도 누군가는 일을 그만두고 MBA나 학업을 떠나기도 하는 거 같아요.

때로는 이도저도 아닌 정말 공백기를 가지며 쉰다기보다는 자신을 채우고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쉬며 여행하며 배우며, 돈을 버는 일이 아닌 다른 모든 걸 하는 느낌이랄까요?)


2. 휴직, 갭이어, 커리어갭 당신에게는 어떻게 들리나요?

이런 모습들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다소 낯설기도 합니다.

언젠가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 나라의 사람들도 쉼이라는 걸 아는구나, 그리고 그걸 대놓고 이렇게 공개할 수도 있구나 하는 약간의 당황스러움이랄까요.

물론 제 느낌상 저보다 선배인 분들이 이런 글을 올리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 보입니다. 대부분이 MZ라 불리는 제 또래 혹은 후배님들이 쉬어감을 선택합니다.

슬프게도 선배님들은 아마 자발적 쉼이 아닌, 강제된 쉼을 누려야 할 시기가 되어서일 수도 있겠구요. 또한, 번아웃은 주부에게도 많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정작 주부에는 휴가는커녕 퇴근도 허락되지 않으니, 이들에게는 휴직이라는 단어조차도 남의 이야기이겠습니다.


3. 그래도 저는 몇 년 전 GAP Year라는 개념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너무 다행이고 반갑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GAP YEAR(갭이어):

갭이어란, 학업이나 업무를 병행하거나 잠시 중단하면서 봉사, 여행, 진로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의 활동을 체험하며 흥미와 적성을 찾고

앞으로의 진로를 설정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출처: 한국갭이어)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런 거였어!라면서요. 그때만 해도 제가 30대일 때라, 나의 현재보다는 과거에 적용하려 했던 거 같아요(과거에 대한 미련과 함께 현재를 더 개선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달까요). 내가 어른이 되기 전 이런 갭이어를 가질 수 있었다면 나도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적어도 조금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등등의 생각을 하며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갭이어가 없었던 거야. 없기는커녕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 분위기상 아무도 허용해주지 않았겠지라는 불평의 마음과 함께 말이죠. 상상해 보건대, 갭이어를 우리나라의 10대들이 선택할 수 있다면 자신이 조금 더 원하는 진로나 전공(대학 혹은 대학 아닌)을 선택해 좌충우돌이 덜할 거라 믿습니다. 적어도, 고3 되면 수능, 수능 보면 대학, 대학 졸업하면 취업, 취업하면 결혼 등등의 무언가 하나를 끝내야 하고 그다음엔 마치 운명론처럼 줄줄이 소시지로 예정되어 있는 정답이 있는듯한 삶을 꼭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월이 흐른 만큼 갭이어라는 개념도 삶의 방식도, 점점 많이 활성화되어 갭이어를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하려 하는, 혹은 시작한 후 쉼이 필요하거나 다른 선택을 찾아 나서는 이들 사이에서요.

한국갭이어라는 사이트에서는 봉사, 인턴, 여행, 다른 나라 언어 배우기 등의 아주 다양한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를 통해 갭이어를 꿈꾸고 마음먹은 사람들을 연결해 주고 지원해주고 있네요.


3. 갭이어나 휴직 등 일을 아예 멈추고 쉬는 것 외에도, 일상에서의 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휘게(hygge)나 피카(Fika) 등도 있습니다.  

휘게는 아늑하고 기분 좋은 상태,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소박한 일상을 중시하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식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고 해요. 아래 이미지 중에서도 저는 왼쪽의 따뜻해 보이는 양말을 신고 있는 저 발 두 쌍이 참 좋아 보이네요. 물론 벽난로가 한몫하겠죠!

오른쪽 이미지에 보이는 휘게 홈에 필요한 인테리어가 요즘 유행이기도 하고, 집집마다 갖추고 있는 듯한데 과연 이런 소품을 집에서 “실제로” 누리고 있는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닌듯 하구요.  


그리고 피카는 스웨덴어로 ‘커피 브레이크’, ‘티 타임’이라는 뜻인데,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차 한잔의 여유를 갖자는 거겠죠. 스웨덴에서는 피카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어요. 스웨덴 사람들을 대표하는 시나몬빵과 달라 호스(Dala Horse)가 담긴 사진이 피카의 느낌을 잘 보여주네요.


휘게나 피카라 이름을 붙인 카페도 심심치 않게 서울의 도심 이곳저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북유럽식 Life style을 동경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철학과 삶을 곧바로 적용한다는 건 쉽지 않을 테니, 피카 휘게 등의 작은 개념과 일상부터 녹여보려는 흔적이라고 저는 봤어요.


4. 문제는 ‘불안’입니다.

쉼, 휴식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싫어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갭이어, 커리어갭, 피카 이런 단어를 몰라서 쉬지 못하는 거나 번아웃을 경험하는 건 절대 아닐 겁니다.


빌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 운동 시 문구로 사용했던 “It’s the economy, STUPID”(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는 클린턴 후보 캠프의 제임스 카빌이 고안했는데 당시 미국의 화두가 되었던 ‘경제’ 이슈를 선거판으로 가지고 와 클린턴의 대통령 당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저는 이 문구를 이렇게 바꿔 보고 싶네요.

“It’s the anxiety, STUPID”


제가 가진 애플 펜슬로 한번 적어봤는데 의도한만큼 강렬하게 다가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잠시 쉬어가는 것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와 근심 등으로 불리는 ‘무엇’입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요즘 애들] 앤 헬렌 피터슨 지음 - 이 책에서 특히 밀레니얼 세대의 불안을 정말 잘 표현하고 있는데, 그중 몇 가지를 발췌해 오면 이렇습니다.


”어른이 되어 보니,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케이틀린은 말한다. “그냥 쉴 때 죄책감을 느껴요.”


모든 일이 잘 돌아가게 만들 유일한 방법은 집요하게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 멈춰 서서 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야 할 일들로 납작해진 인생이다.


모든 내적 자원을 소진하고도 그와 무관하게 전진해야 한다는 초조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번아웃을 느낀다.


저는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읽으며 격한 공감과 함께 덮쳐 오는 슬픔과 답답함, 쳇바퀴 같은 절망에 허우적대며 밑줄을 열심히 그었습니다. 달려가도록 규정된 세대, 쉬지 말고 끝없이 일하고 성취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네는 쉴 수 없는 게 맞았던 겁니다.

쉬지 않고 더 달려가면 열정이고 대단하다고 칭송받아 왔으니까요. 때로는 세대 논리로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로, 때로는 체제 논리로 자본주의는 원래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말로.


5.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는 ‘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들러의 가르침을 따온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처럼요. 쓰다 보니, 웃픕니다. 도대체 미움받는 게 뭐라고 쉬는 게 뭐라고 여기에 용기까지 내야 하나 싶은 마음에요!


그렇지만, 진짜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쉬어간다는 건 순리가 아닌 거슬러 올라감이니까요.

어쩌면 이 글은 제가 저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리고 당신을 정당화해 주기 위해 쓰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리고 나의 용기에 점 하나를 더하기 용도로도요.


긴 인생에서 잠시의 쉼, 별거 아니다.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6. 오늘은 글을 쓰다 보니, 잔뜩 패러디를 활용하게 되네요.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습니다.

혼자 가면 빠르게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말로, ‘함께’를 강조하고 있지요. 저는 문득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If you want to go far, take rest.”

우리의 인생은 100미터 달리기 같은 순간도 있지만, 인생 전체로 본다면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과 비유하는 게 더 맞을 겁니다. 마라토너는 달리다가 잠시 생수를 마시기도 하고 땀을 닦기도 합니다. 그렇게 페이스를 조절하며 달려야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는 거겠지요.

인생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7. “잠시 쉬어가도 인생 망하지 않는다. “는 말은 사실 내가 나에게 제일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1달은 정말 짧고 1달 쉬는 게 100세 시대에 정말 별일이 아닐 텐데도, 불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답할 만큼 1달 휴직 앞에 생각이 많았습니다. 쉬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리고 저는 이 말을, 너무 열심히 일하고 그러다 지쳐있는 저의 동료들에게도 이 말을 해주고 싶어요.

나아가서는 1달 휴직 소식에 이해도 안 되고 걱정만 잔뜩이신 부모님께도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저 이 정도 멈춤에는 꿈쩍하지 않을 거라고.

아니, 이 1달이 오히려 내 삶에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 그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8. 당신,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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