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없지만, 가볍게
1. 휴직을 앞둔 나는 하루하루 너무 바빴습니다. 결정하고 쉬러 가기 전 1달 동안은 끝없이 점검하고 일정을 체크하고 팀과 소통하고 back up plan을 짜고 있었죠. 1월 31일부터 휴직 시작인데 1월 30일 오후 6시까지 저의 캘린더는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2. 그러던 차에, 매니저가 슬랙을 보내왔어요. ”너의 휴직을 지원하기 위해 1월 말에 한국 출장을 계획하고 있어. 어떻게 생각해? “
문장 자체로는 참 좋은 말인데, 사실 이 메세지를 받은 저는 분개했던 거 같아요. 도대체 왜, 한국에 오겠다는 건지 그리고 그게 왜 나를 위한 거라는 명분인지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분노하게 한 건 이 메세지가 아니라, 이것 이전에 펼쳐졌던 저를 휴직까지 가게 했던 매니저와의 그간의 관계, 불협화음 등등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매니저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내가 진짜 왜, 누구 때문에 휴직을 가는지 정말 모르는구나 그런 답답함과 절망 같은 마음입니다.
3. 1년 365일 매니저와 옆자리에 혹은 맞은편에 앉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죄송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저는 매니저와 1년에 2-3번 정도 얼굴을 맞대고 일합니다. 주로는 1주 혹은 2주에 30분-1시간 온라인 미팅을 하거나 슬랙을 통해 업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일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니 사실 매니저 출장에 이렇게 별나게 반응할 이유도 사실은 없어요. 어찌 보면 매니저가 외국인이라니 사실은 저에게 엄청난 자유이자 방종을 동시에 허락합니다. 그만큼 저는 위임되어 있기도 하고, 방치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세상엔 무조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보통은 그 자체가 양날의 검이니까요.
4. 자유가 익숙해지면 조금만 통제하려 해도 자유가 없다고 느끼고 그 자유가 내 권리라고 여기게 됩니다. 저를 보니 그래요. 1년에 2-3번 출장 오는 매니저가 싫다니, 배가 불렀다 싶은 객관적인 고백과 함께 그래도 나는 여전히 당신이 왜 오는지 납득이 안된다, 이런 두 마음이 공존하며 싸웁니다.
5. 생각해 보건대, 나를 위해 한국에 오겠다는 매니저의 말과 마음이 저에게 와닿지 않고 또 신뢰하기 어려운 게 거부감의 핵심입니다. 유치한 말이지만, 한국에 놀러 오고 싶어 한국 출장을 기획한 것처럼 느껴지고, 휴직하러 가겠다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기 위해 한국에 오는 게 분명하다는 가설도 만들기 시작하는 저를 봅니다. 내가 1년을 비우는 것도 아니고, 고작 1 달인데 이걸 위해 온다는 게 오히려 나에 대한 불신으로도 느껴집니다. 분명 1달간의 엄청난 back up plan을 저는 수립해 두었고 그걸 이미 매니저와 공유도 했거든요. 무엇보다 휴직 전 매니저가 나를 만나러 오면 동기부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일텐데(케어 받는다고 느껴서) 나의 휴직의 주요한 요인 중 제일 큰 매니저가 온다는 건 오히려 휴직 전 스트레스를 더 강화시키는 부작용일뿐이고 매니저는 모르는 나만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는 게 고통이기도 합니다.
6. 네, 저는 매니저를 잘 신뢰하지 못하고 있어요.(어쩌면 그들도) 가장 큰 이유는 매니저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고요.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답게, 내면 깊숙한 이야기까지 꺼내서 이야기도 해보고 때로는 전략적으로 접근도 해보고 어떨 땐 판을 깔고 진짜 진지하게 내가 기대하는 건 이거고, 이게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제 결론은 이제 하지 않겠다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매니저는 나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나 역시 매니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고 더는 노력해서 소통할 가치를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7. 회사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회사 내 여러 사람들을 떠올릴 때 가장 부딪히고 싶지 않고 대화 나누고 싶지 않은 대상이 ‘매니저’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생각하면 어딘가 불편하고 그래서 피하고 싶은데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미래이자 현실이더군요. 매니저를 떠올리면, 나는 돌아가는 게 맞을까, 진지하게 고찰하게 됩니다.
8. 그러다 친한 동료가 쉬고 있는 저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얼마 전 미국 본사 출장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제 매니저를 봤다고 하면서 “K님(저) 매니저가 K님하고 캐릭터가 많이 다르던데요? 그냥 똑같이 가볍게 대해요.”
오, 뭔가 작은 깨달음과 힌트가 온 느낌이었어요. 저의 시종일관의 진지함과 목표 지향적인 마음을 내려놓아보자. 늘 진실하고 ‘나’로 대하던 관계에서 가면을 쓰는 건 아니어도, 가벼워질 수는 있지 않을까? 사람을 가볍게 대한다기보다는 그와 나 사이의 농도를 가볍게 하자는 의미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어요.
9. 이렇든저렇든 제 매니저는 1월 29일에 한국에 왔습니다. 제가 2개 부서를 맡고 있어 사실상 매니저가 둘인데, 친절하게도 다른 매니저까지 같이 모시고 왔습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사무실로 저를 만나러 왔는데, 그들의 눈빛이 심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윽하고 촉촉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며, “K, are you okay? I’m here just for you.”
이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내가 1달 쉬는 게 뭐라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게 정말 이런 거라고 생각해!라는 온갖 비명과 말은 마음속에 집어넣고,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며 대충 자리를 마무리합니다. 그렇게 나의 매니저들은 나와 우리 팀을 만나고 한국에서 먹고 싶었다던 간장게장과 감자탕에 만족스러워하며 돌아갔습니다.
10.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도 했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고도 하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저를 응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