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깊게, 뜨겁고 담담하게
1. 재작년 여름쯤으로 기억합니다. 고객사 요청으로 우리 회사의 업무 하는 방식 및 내부 체계에 대한 발표를 하러 갔던 때입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과 토론하는 시간이었는데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S사(내가 다니는 회사)가 정말 좋은 회사라 그런 걸까요? K님 발표에서 진심과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순간 살짝 당황했지만, “아 그렇게 느끼셨다면 감사합니다.”
고객이 얘기한 ‘진심과 열정’이라는 단어에 사실 저는 좀 놀랐습니다. 그때의 저는 나의 진심과 열정이 예전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끼며 약간의 자책을 하던 찰나였거든요. 내가 아직도 열정적으로 보인다고? 이 정도 농도의 이야기로도 내 발표에서 진심이 느껴진다고? 아닌데, 나는 120의 열정을 쏟던 사람이었고 지금은 그에 비해 80 정도밖에 안 쓰고 있는데? (그마저도 지금은 70으로 떨어졌다는 슬픈 현실)
2. 얼마 전에도 글에 쓴 것처럼 번아웃 진단 결과로는 번아웃이 아니라고 나온 것 역시 이상해 상담사님과 대화를 나눠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주시더라고요. 번아웃은 객관적인 결과가 아니라, 주관적인 결과다. 그리고 K님은 다른 사람보다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60점이 되어야 번아웃이라고 느낀다면 K님은 7-80점만 돼도 스스로 위기감을 느끼고 에너지가 많이 떨어진 거라고.
이 말로 많은 게 이해되었어요. 나의 주관적인 점수와 타인이 보는 내 모습 사이에 gap이 발생하고 있고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거라고. 아, 내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구나 이런 자기 인식도 다시 한번 되었고요.
3. 돌이켜보면 휴직을 주저하게 했던 몇 가지 생각 중 ‘내가 열정을 잃은 걸까 ‘ + ’주변에서 나를 일에 오너십 없는 사람, 열정 없이 일하는 사람으로 보는 게 싫다 ‘가 있었습니다.
쉬면 열정이 사라진 건가? 열정이 작아진 건가? 나는 정말 어떤 상태인거지? 스스로 확신을 잃으니, 타인의 시선도 괜히 싫고 더 신경 쓰였던 거죠.
4. 방전된 배터리에 충전기를 꽂아 잔량이 높아지는 핸드폰처럼 쉬면서 충전이 되니 이제는 알겠습니다. 나의 열정은 사라지거나 식은 게 아니었어요. 그저 나는 지쳤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 놓이지 않았을 뿐이었어요.
한 달간,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로 내 머릿속을 전환하는 노력을 상담사님과 하면서 배우고 깨달은 게 꽤 많았습니다. 일을 하며, 팀을 맡으니 늘 제 머릿속에는 이걸 해야 하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렇게 해줘야 하고 등등의 생각이 가득했어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나’는 잘 보이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과 ‘일’이 내 삶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삶이 ‘해야 하는 삶’이었어요.
그걸 ‘하고 싶다’로 바꾸니 비로소 내가 보이고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작게는 ‘뭘 먹고 싶다, 어디에 가고 싶다’부터 크게는 ‘무엇을 원한다, 어떻게 하고 싶다’까지 펼쳐지기 시작하면서 열정의 불씨가 다시 커지는 걸 느꼈어요. ‘MUST’ ‘SHOULD’에 압도되어 ’WANT’ ’LONGING‘이 힘을 잃고 있었겠다는 깨달음과 함께.
5. 검색으로 많은 걸 배우는 저는 이번에도 네이버에는 ‘지속가능한 열정’을, 구글에는 ’sustainable passion’이라고 검색을 해봅니다. 매우 보편화되어 있진 않아도 여기저기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언급된 걸 보니 반가운 마음이 크네요. 일종의 위로와 공감인 듯해요.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인 거죠. (물론 다른 여러 의미로도 많이 쓰이네요)
과거의 저에게 열정이란 ‘불태우는 거’였어요. 그때는 불태워도 불타지 않고 그냥 계속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게 가능했거든요. 젊어서였든 진정 열정을 계속 불태울 수 있는 상황이었든 말이죠.
지금의 저에게 열정은 지속가능성입니다. 마치 연인의 사랑은 불타오르는 뜨거운 감정이지만, 부부의 사랑은 깊어지고 지속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비유해 보자면 끓어오르는 냄비가 아니라 천천히 뜨거워져 온도가 지속되는 온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6. 복직을 앞두고 4가지 키워드를 찾아 나 자신에 대한 다짐 같은 문장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언뜻 보기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단어들을 일부러 바로 옆에 배열했습니다. 저의 마음가짐과 추구하는 게 뭔지 느껴지시나요?
가운데 두 가지 ‘깊게’와 ‘뜨겁고’는 본질의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넣었습니다. 반면, 바깥의 ‘가볍고’와 ‘담담하게’는 나의 바깥을 향하는 내 모습이자 외부와의 관계에 대한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 적어봤습니다.
7. 지속가능한 열정, 저는 그 여정에 있고 한 달의 휴직은 그 길의 시작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의심 없이 자신 있게 말해봅니다.
“나는 변함없이 열정적인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