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도 좋다.
1. 지금 다니는 회사에 저를 뽑아 준 첫 매니저는 제 레쥬메가 무척 흥미로웠다고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에게 물어보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 이력을 수치화해서 적은 부분 중 어딘가에서 감동(?)을 받은 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2. 그중에서도 나 스스로도 데이터를 보고 놀란 결과가 하나 있는데 그건 D사에서 일하며 만난 고객의 숫자였어요. 3년간 매년 약 1,000명 가까운 수의 사람을 만나고 강의했다는 데이터를 보며 뿌듯하기도 하고 참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을 스스로 해보았습니다. 선배 트레이너가 어느 월요일 미팅에 자신이 지난해 몇 시간의 강의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며, 나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바로 실행한 그 시절의 나 자신을 칭찬합니다.
3. 그때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 강의하고 비즈니스 경험을 쌓은 나 자신이 참 나답고 대단하다 느꼈었는데,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4. 상담 첫날 진행한 그림 그리기에서 생각보다 많은 통찰을 얻었는데 그중 하나는 사람 그리기 활동이었어요. 상담사님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는데 내용은 이랬습니다.
1) 필압이 약하다: 삶의 에너지가 떨어져 있다는 뜻
2)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불특정 다수를 그렸다: 사람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고 떠올리기 싫다는 의미
보통은 사람을 그려보라 하면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지인을 그린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그냥 진짜 아무나 그렸어요. 그림을 못 그려서이기도 하지만, 누구를 떠올리지도 않았던 거 같아요. 약한 힘으로 그려낸 알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린 그림은 나도 몰랐던 당시의 나를 참 잘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5. 문제는 이런 상태에 비해 평상시의 내가 너무 E(외향형)이고 주변 사람들과 그렇게 오래 지내왔다는 점이었어요. 흔히 말하는 인싸를 넘어 핵인싸라 불리는 게 저였으니까요.
모두와 친해 보이지만 사실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편안함을 느끼는 나는 사람을 만나며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덮치듯이 받은 “당신의 에너지 뱀파이어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쏟아지듯 떠오른 가깝게 지낸 지인/동료가 떠올랐음은 일종의 충격이었던 거 같아요.
6. 그렇게 변한 나를 깨달은 나는 진심으로 삶의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2년 넘게 살았던 동네도 과감하게 떠나 이사를 했고(물론 수없이 많은 이유의 결과였지만) 만나자는 연락을 받으면 무기한 연기/양해를 통한 다음을 기약/온라인 미팅 등으로 바꿔갔습니다. 일로 인한 불가피한 만남이나 나의 도움이 절실한 만남 외엔 대부분 그랬던 거 같네요.
7. 그렇지만 명백하게 저는 ‘대인기피증’은 아닙니다. 만날 수도 있고 만나는 게 고통스러운 건 아니니까요. 그저 채움이 있는 관계가 더 절실했고, 내가 나를 아끼고 충전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겁니다.
8. 혼자로서의 여정은 당분간 계속될 듯합니다. 가족은 늘 내 곁에서 단단한 바위처럼 함께 해주니, 외로울 새는 없습니다. 언제쯤 내 삶의 에너지가 완충될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지금 인대로 가보려 해요.
9. 그래서 휴직은 아무도 안 만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족 명절, 아이들을 위한 시간 외에 정말 오롯이 나로만 시간을 보냅니다. 만나자고 연락하며 휴직하는 나를 걱정하는 따뜻한 사람들에게는 정중한 거절을 보내며 조금은 불편하지만 이기적인 돌봄의 시간을 쟁취했습니다.
10. 다음은 무엇일까요? 나도 내가 궁금합니다. 혼자여도 제법 꽤 괜찮고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