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plans are the best plans.
1. “K님, 부러워요. 2월에 뭐 할 거예요?”
2. 좌충우돌 휴직을 결심해도 그 계획이 확정되는 데까지는 꽤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휴직하겠다고 매니저에게 말한 후 거의 한 달간은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평소보다 더 바쁘게 지냈거든요. 제가 없는 1달에 큰 문제가 없게 하고 1달 후 돌아왔을 때에도 큰 어려움이 없도록 세팅하는 건 생각보다 신경 쓸게 많은 일이었어요.
- 주요 파트너사에 매니저 부재 및 담당자 공유
- 1달간 팀의 휴가나 비용 지출에 대한 승인 delegation
- 1달 후 팀에 입사해야 할 팀원 입사 프로세스 준비 및 진행
- 팀에 퇴사해야 하는 직원의 회사 자산 반납 등 프로세스 진행
- 1달간 나의 부재로 팀원들이 어려운 업무 결정이나 승인이 막힐 때를 대비해 상위 매니저와 1 on 1 등의 미팅 협의 및 세팅
- 수습 중에 있는 팀원에 대한 평가를 함께 고려할 수 있는 프로세스 설정
- 캘린더에 예정되어 있는 미팅 취소 및 캘린더/이메일/슬랙 휴직 notification 설정
- 내부에서 주로 협업하는 매니저들에게 양해 구하는 연락
- 내가 없는 동안 임신 중인 팀원이 과도한 업무로 고생하지 않기 위한 선긋기와 업무 철통 방어
- 공백기를 메우기 위해 최대한 당길 수 있는 업무는 처리하고 미룰 수 있는 업무는 복귀 후로 미리 일정 세팅해 두기
3. 적고 보니, 정리해야 할 일의 카테고리로만도 약 10가지, 제 예상보다도 더 많네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빨리 셋업해야 한다는 분주한 마음, 이런 상황에서 진짜 휴직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는 복잡한 심경, 팀원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잘 해결되고 나는 잘 갔다 또 잘 다녀오려나 하는 알 수 없는 혼란과 스트레스가 가득했던 게 느껴집니다.
4. 사실 휴직을 한다는 건 그만큼 쉼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쉼을 누리기 위해 일을 더 많이 하고 신경을 더 써야 한다는 건 아이러니이긴 합니다. 그냥 그 순간에 다 툭 던져놓을 수는 없는 게 직장인의 현실이고 매니저의 책임이니까요. 에너지는 없지만 책임을 다하기 위해 버티며 마무리를 하는 저는 너덜너덜했어요. 그렇더라도 1달 쉬러 가는 제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한 현실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좋아 보이기도 했을 거예요. 실제 긴밀하게 일하는 한 분은 저보다 더 심각한 상황임에도 휴직이라는 제도 자체가 없어 힘들어하고 계셨으니까요.
5. 한편으로는 기왕 가는 1 달이니 제발 잘 쉬고 오라는 염원 같은 당부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팀원도 옆 팀의 매니저도 친한 친구도 1달 동안 뭘 할 거냐고 묻습니다. 해외여행을 갈 거냐, 1달 살이를 할 거냐 등 보통 쉰다고 하면 등식처럼 떠오르는 ‘여행’ 이야기를 많이들 한 거 같아요.
6. 하지만 1달의 계획이 뭐냐고 묻는 질문마저도 버겁고 답답하고 답하기 힘들었거든요. “글쎄요, 별 계획 없어요. 일단 쉬려고요. 어디 갈 힘도 없어요.”
정말 솔직한 심경이자 정직한 현재의 상태였어요. 그래서인지 제 얘길 듣던 팀원 한 명은 갑자기 울기도 했습니다. 놀라서 왜 우냐고 묻는 저에게 자세한 답변을 해주진 않았지만 제가 좀 안쓰러웠던 게 아닐까 해봅니다.
7. 주말에 뭘 하고 놀지 1달 계획이 미리 세워져 있는 MBTI ‘J‘인 저라도 쉼이 필요할 땐 계획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계획이라는 건 그것을 세울 힘과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더라고요.
8. 그렇게 저는 계획도 없고 의도도 없는 쉼을 가졌습니다. 아침에 알람을 맞추지 않고 일어나는 것부터가 ‘계획 없는’ 휴식하는 삶의 시작이라는 것도 깨달았고요. 몸이 근질근질해질 때가 쉬어도 보았습니다.
9. 비지니스에서는 계획이 없는 걸 거의 혐오에 가깝게 싫어하고 때론 계획이 없음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한 명의 개인이니까요. “No plan is the best plans.”이라는 책도 있는 걸 보면 저 같은 사람도 꽤 많을 듯합니다.
10. 네, 계획이 없는 게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