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의 도피를 쓴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2차 대전을 목도하며 히틀러 현상을 분석한다. 마르틴 루터, 칸트, 헤겔 그리고 니체의 고장인 계몽과 지성의 나라 독일에서 어떻게 히틀러 같은 악귀가 출현했는가? 천인공노할 만행 앞에 저 독일인들은 왜 눈을 감았는가?
프롬은 이런 의문에 대해 '권위'라는 매개를 들며 해석을 시도했고 히틀러도 독일인도 모두 권위에 함몰 되어있었던 결과라고 답했다. 히틀러는 경제공황이 전 세계를 덮쳐 자국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탁월한 연설로 독일 순혈주의를 고양시켰고 타 민족 말살 정책에 찬동한 국민의 맹종 속에 배타적 민족주의를 실현했다.
어려운 여건을 돌파해 줄 강력하고 독보적인 존재가 필요했던 독일인, 이런 정세를 꿰뚫어본 히틀러, 그들은 그렇게 광기어린 홀로코스트 게임의 한 팀이 되었고 유대 족속을 운동장 삼아 지칠 줄 모르는 계주를 이어갔다. 프롬은 지배하고 싶은 자도, 지배받고 싶은 자도 모두 '권위'에 짓눌린 자들로 보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충직하고 성실한 공직자였다. 하지만 맹종과 결합된 충직ᆞ성실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을 낳아 버렸다. ᆞkantrolᆞ
역시 핏빛으로 뒤덮인 하늘과 땅에서 히틀러 현상을 바라본 유대계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하고는 큰 충격에 빠진다.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주도했던 살인마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지극히 성실하고 평범한 중년 남자를 봐 버렸기 때문이다.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시대에 단순히 상부 지시에 따랐을 뿐 유대인 학살은 업무상 절차였다며 담담히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히만을 지켜본 아렌트는 거대한 악은 지극히 평범한 자에 의해 자행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아이히만이 명백히 유죄인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고 결론내린다.
자신의 행위가 누군가를 죽이는 짓이고 그런 결과가 초래될 것을 인식하였음에도 단순 업무로 환원시켜버렸다는 것은 옳고 그름, 정의와 윤리에 대한 이성적 존재로서 자신의 판단을 방기해버린 결과였던 것이다.
프롬과 아렌트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대 동족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세상의 가혹함을 회피하지 않고 지적 탐구를 더하여 마침내 히틀러 현상에 대해서 비슷한 결과를 도출해냈다. 즉 권위에 짓이겨진 이들은 그것을 두려워해서든 또는 흠모하든 스스로 판단하기 보다는 타인의 의지를 대신하는 길을 택한다는 것, 그 길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면서도 말이다.
계급과 권위로 묶여진 경찰동일체의 원칙
계급과 상징을 크고 아름답게 새겨 가슴과 어깨 팔 부분에 도드라지게 한 제복을 보면서 화려함과 크기 개수에서 빈약한 계급은 생각도 행동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순경패밀리(순경~경사)의 무궁화 봉우리가 닫힌 상태인데 활짝 핀 꽃에 비해 마땅히 열등할 수밖에 없다. 즉 중앙경찰학교 졸업은 곧 열등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그렇게들 순경 딱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나보다.
경찰의 계급장은 차별과 열등을 상징한다. 하위직급은 닫힌 무궁화 봉우리-덕분에 무궁화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지만-상위직급은 활짝 핀 무궁화다.
계급의 속성은 계급적 인간을 만드는데 있다. 낮은 계급이 그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계급에 모든 것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승진안에 능력ᆞ성공ᆞ자존감을 이입함으로써 계급에 더욱 종속하도록 한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와 이성적 판단보다는 복종을 통해 부여 받는 승진을 최고의 가치이자 낙으로 삼게 한다.
그렇게 승진 궤도에 한 번 올라서면 쉽게 이탈하기는 어렵다. 이는 승진 맹종자들을 양산하여 승진을 하든 못하든, 그 궤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이 궤도에서 실속 챙기며 안정적으로 달려온 계급홀릭들은 낮은 계급이 계속 우러러 봐주기를 원한다. 자신이 위를 향해 매달리는 것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겁박으로 때론 자상함의 탈바가지를 쓰며 한 눈 팔지 못하게 한다.
이처럼 계급은 보다 높은 계급을 섬기는 것으로 타인 속박의 정당성을 찾게 한다. '나도 까니까 너도 까' 이러한 논리가 조직 전체를 포장 쳤고, 조직원의 심리에 깔렸다. 그러므로 모두가 권위로 하나 되어 마침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검찰 고름 터지는 소리가 경찰에게 던지는 메시지
어제 오늘 검찰청에서 펑펑 고름 터지는 소리를 듣고 있다. 꽤 오래 곪았던 듯 자고 일어나면 하나씩 터지고 있다.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그나마도 들으려 하지 않았던 그들, 그러기에 권위와 계급에 취한 자들의 말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나보다. 그렇다. 물론 알고 있다. 그들 못지 않게 경찰 역시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고름이 여기저기 돋아나 있다는 것을.
아무튼 이런 토대 위에 개혁될 경찰이라는 것은 없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어리석은 자는 없듯이 경찰이 꿈꾸는 수사의 주재자도, 직장협의회의 안착도 계급과 권위 위에 쌓을 수는 없다. 우선 그것들을 걷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바로 당신이 보고 있는 조직 안팎의 부당함과 부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