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lisopher Jun 02. 2019

칸이 택한 '기생충'

계급의 숙주




‘살인의 추억’과 ‘괴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봉준호는 ‘설국열차’, ‘옥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본질, 말하자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을 극단에 놓고는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꼬리 칸에서 마치 사육되는 가축 같은 인간들의 역동이 왜 머리 칸으로 향하는지 보여준다. 그러한 은 배곯은 비참함보다 존엄을 잃은 인간이 어떤 파괴력을 드러내는지 알게 해 준다.     


‘옥자’는 가축이라는 생명이 인간 생존권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방식으로 도살되는지 살핀다. 컨베이어 벨트 그리고 정교하게 살점을 분리하는 기계 앞에 한 생명은 합리적 가격의 고기가 된다. 생명도 거대 자본 앞에서 상품으로 바뀐다.     


‘기생충’ 역시 자본주의가 정해놓은 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룰이 있기 때문에 지키는 이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생긴다. 자본주의는 말한다. 돈이 곧 룰이라고, 따라서 승자는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올해 칸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던 모양이다.    


자본주의 속 모든 인간은 소외되는 것일까

    

러시아 중국의 전통 경제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패권을 차지한 자본주의, 숱한 비판이 있지만 이를 대체할만한 무언가는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완벽한 시대’가 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지배적인 체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을까. 그것은 인간들이, 특히 극대다수의 지구촌 사람들이 이 체계에서 소외되고 있으며, 또는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는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해 온 인간들, 말하자면 이념의 평등에 길들여진 그들이 맞닥뜨린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비록 자유주의의 궤도 위에 선 자본주의라지만 경제적 자유와 평등의 길을 지나쳐 내 달려가고 있는 듯 보이니까.      


자본주의가 만든 ‘기생충’    


누군가에게 빌붙어 사는 자들을 빈대 혹은 기생충이라 일컫는다. 영화 ‘기생충’은 양극단에 선 이들 중, 기생충이라 불리는 자들의 시선을 따른다. 그들은 돈벌이가 변변치 않다. 하지만 편익은 누려야 하겠으므로 공짜 WIFI를 찾아 헤매고 값싼 유사 맥주를 마시며 허기를 달랜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그들이 나면서 가난하고 소외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본에서 배제되어 온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어렵게 얻어낸 일자리들은 즉시 오늘과 내일의 위태로움이 되었으니 품위유지는 고사하고 자녀 교육과 기본 생계 또한 위협받는다.     


단골 취객의 노상방뇨 그리고 행인들의 오가는 걸음걸이만 비치는 반지하방 창문 밖은, 세상에서 멀찍이 격리된 감옥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렇게 자본주의가 쌓아 올린 벽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부자인척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애초에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삶의 기본을 갖추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돈이 돈을 낳는 세상에서 자본이 없는 이들은 궁핍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채나 은행 빚을 끌어당겨야겠지. 쪽박을 각오해야지만...    


하지만 ‘기생충’들은 다른 방식을 택한다. 이래도 저래도 리스크는 불가피한 만큼 부잣집에 들러붙는 쪽을 택한다. 비록 그 과정이 불의하지만 그들에게는 TV만 켜면 볼 수 있을만한 코미디 한편처럼 가볍다. 문서 위조와 신분 위장은 재기 발랄한 기예에 불과하다.    


그렇게 재벌 집에 무혈입성한 기생충들은 주인 없는 넓은 집 거실에서 비싼 술을 마시며 한껏 취해보지만 자신들의 모습이 허상이라는 것을 이내 안다. 명문대학생, 베테랑 운전자, 가정부를 그럴싸하게 연기했지만 그들의 목구멍만 더욱 타 들어갈 뿐이다.  


운전기사 말이야.. 뭔가 선을 넘을 것 같으면서 넘어오지 않는 게 마음에 들어... 하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사라지지 않아..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같은...   


영화 '기생충' 포스터


옷으로 표정으로 행동 따위로 대저택의 주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코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기생충들이 풍기는 냄새는 뿌리 깊었으며 뽑아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마치 '있고 없음'은 생래적이라는 듯이.    


어두운 세계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다. 대저택은 자유가 아닌 보다 넓은 감옥이었을 뿐이었다. 어디를 가도 소용없다고 깨달았을까. 퀴퀴한 자신들의 냄새를 맡아버린 자를 향해 칼끝을 돌리는데...  

   

경찰관, 계급의 숙수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급은 더욱 높아지고 있고 그런 이유로 계급 체계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 말한다.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영화는 자본주의가 나은 ‘계단’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빈부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2011년 경찰청은 역사상 유래 없는 '계급 가리기'*를 시도했다. 계급 지상주의를 경계하고 업무중심으로 돌려보자는 취지이기는 하였으나 자본주의 속 관료 조직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나마도 반년을 넘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2011년 시범운용을 거쳐 시행된 경찰장견장, 이후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계급장으로 돌아간다. 사진=연합뉴스


경찰의 계급은 돈이 나눈 계급과 그 본질이 같다. 많이 쌓을수록 혜택과 명예?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상술이 묵인되는 만큼 승진을 위한 궤책도 상당히 세련되어왔으며 심지어 비책으로 대물림되고 있다.    


따라서 ‘기생충’의 충격과 비극은 경찰 안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계급을 위해 양심은 전당포에 늘 맡겨야하며 동료를 누르 선의의 경쟁이자 처세술이라 믿어야한다. 심지어 고귀한 생명마저 맞바꾸려 한다.    


기생충의 결론을 말해서는 안 될테지만 그 마지막 메시지를 따른다면 경찰은 앞으로도 계급 추종적 사회가 이어지게 된다. 경찰 개인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을 높일 방편으로 그것이용한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실은 계급의 '숙주노릇'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 경위 이하 경찰관들에게만 계급장 대신 경찰장을 부착한 적이 있었다. 이는 또 다른 계급갈등을 야기한다는 비판 아래 6개월 만에 환원된다. '경찰장'비록 생명이 짧았지만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주었다.


이전 02화 경찰개혁의 No.1-발전적 계급 해체를 위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