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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lisopher Jun 01. 2019

욕설 비례의 원칙




욕설 VS 존칭, 비상식적 반인권적 비대칭 구도  

  

‘야 저리 안 꺼져’ ‘병신들아 끼어들지 마’ ‘씨발 개새끼들이 뒈질라고’ ‘좆 까는 소리 하네’ 등.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쏟아냈다고 하자.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이런 씹새끼를 봤나, 어따 대고 욕이야. 술 쳐 먹었으면 집구석에 들어가 쳐 자빠져 자. 개호로 새끼야. 주댕이를 확 찢어버리기 전에’ 나라면 이런 식으로 표현할 것 같다. 공론의 장에서 거친 표현을 여과 없이 쏟아낸 점 양해를 구한다.    


위 욕설에 대응한 나의 욕설에 공감되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실제로 감정 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앓고 있지 않는 한, 성정이 차분한 사람이라면 불그락 불그락 삿대질에 항의하고 따지고 들 것이며, 불같은 사람이라면 욕설이 터지기 전 주먹이 상대의 턱에 먼저 당도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감정이자 행동이겠다. 그러나 경찰은 아니다. 유사한 색채의 음성이라도 돌려주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고 말 것이다.    


“선생님 신고받고 왔어요”

“야 저리 안 꺼져”

“도와 드리려고 왔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병×들아 끼어들지 마”

“욕은 하지 마시고요”

씨× ××들이 뒈질라고”

“자꾸 욕하면 처벌할 수 있어요”

×까는 소리 하네”    


어제도 겪었으며 오늘과 내일도 겪을 경찰과 주취자의 대화의 한 대목이다. 실제 현장의 토킹 어바웃은 저렇다. 위 대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문명이 시작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에게 허용되고 있는 ‘눈에는 눈’ 시스템이 허용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소위 ‘TORAI’ 즉 궤도 이탈한 자와 똑같이 놀 수 없는 노릇이지만 문제는 ‘공익의 리벤지 기관’*중 경찰만이 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경찰은 물먹는 하마처럼 알콜맨들의 온갖 욕설과 술 냄새와 배설물을 흡수한다. 이어 검찰은 반성과 참회의 눈빛으로 초롱초롱해진 그들을 받는다. 이윽고 법원은 참회를 넘어 비둘기처럼 순결해진 그들을 받는다. 그들은 결코 새벽 4시 44분에 마른 노가리 안주와 해물탕 섞인 알코올 냄새를 맡지 않는다. 따라서 욕을 들어 본 적도 멱살을 잡혀 본 적도 없으며 평생 겪어보지 못한다. 국민을 위한 공익적 복수를 맡고 있다지만 어디 같은 일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검찰과 법원은 공익적 복수 기관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냉정하고 꼼꼼하게 법률을 적용하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차분한 어투로 혼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이 시민의 복수 기관이면서도 자신의 복수를 끼워 파는 원인은 이렇게 발견된다. 시민의 복수는커녕, '짭새 테러'에 대한 심리적 방어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그들이 공익이라는 솥 안에 개인의 恨과 짜증을 갈아 넣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욕설 비례의 원칙    


경찰관 직무집행법의 서두인 목적과 직무범위 항목에 등장하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라는 문구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가슴이 두둥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경찰의 존립 가치 중 최상의 가치라고 믿는 나에게는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뜨거운 것’은 형체가 없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 경찰의 몸이 내외적으로 비대해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 신통방통한 표현이 있으니 바로 ‘필요한 최소한도’라는 말이다. 비례의 원칙이라 일컬어지는 대목, 이 역시 형체가 없다. 역시 잡히지 않으니 종잡을 수 없지만 이는 반대로 빨아들이는 것을 차단하거나 내뱉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을 뱉어야 하고 차단해야 하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은 지구 상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다만 유려한 해석자들만 득실거리고 있을 뿐.   

 

명확하지 않은 문구가 경찰 역할의 기반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현장 경찰 앞에 펼쳐진 난센스, 모순, 난처함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니 복수의 칼을 벼려본들 제대로 베어 볼 수나 있을까. 만연된 욕설로 내적 피폐함이 극에 달한 데다 신체의 안위마저 늘 위협받고 있는 주제에 어찌 국민의 복수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정신적 고통, 심리적 압박에서 무방비 상태인 경찰관들. 그들이 맡고 있는 치안 강국 대한민국, 현실인가 허상인가.    


경찰업무인지 아닌지는 결국 경찰이 출동해야 알 수 있다. 즉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경찰 업무에 해당된다. ‘공공의 안녕’이 휘감고 있는 넝쿨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의 복수심의 대변자인 경찰이 모욕을 당하고 얻어맞아도 즉시 되돌려주지 못하는 것은 ‘필요 최소한도’라는 체인 풀린 자전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찰의 입과 언론의 입에서 십수 년간 제기되고 있음에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은 위 두 가지 원칙의 시너지 덕분? 아닐까.    


형이상학 원칙들은 손 볼 수 없으리라. 블랙홀을 누가 마셔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럴 바엔 욕설 비례의 원칙이라도 허하자. 상대가 평어를 하면 평어를, 반말을 하면 반말을, 욕을 하면 1차 경고를, 계속 욕을 하면 같은 크기의 욕을 하고 법집행을 한다. 비례의 원칙은 복수의 원칙이다. 이 원칙이 제대로 작동될 때, 경찰의 恨(한)苦(고)痛(통)은 확 준다. 추측컨대 욕설 비례원칙이 자리 잡으면 질서가 서버릴 것이다. 거지든 부자든 욕먹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더라.    



*

국가에 의한 간접 복수만 허용되고 있는 가운데 검찰 법원과 함께 대표적으로 복수심 가득한 조직이 경찰이다. 특이한 것은 국민의 법 감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체크하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경찰 지만 그것이 시민의 복수를 위한 것인지 경찰 자신의 복수 때문인지 헷갈려한다.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으므로 경찰의 공익적 복수와 개인의 분풀이가 뒤섞이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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