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말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밖은 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날씨였다. 본관 정문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당직실은 세 사람이 모여있기엔 좁은 편이었지만 텔레비전이 있고 컴퓨터가 1인 1개 놓여 있었으며 무엇보다 따뜻했다. 밖은 캄캄했다. 본관 밖을 비추던 조명이 있었지만 적막함이 더해진 탓인지 더 어둡게 느껴졌다. 새벽 1시, 머리는 맑았다. 두어 시간 눈을 부치고 온 덕분이었으리라. TV에서는 그 시간에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예능 방송이 왁자지껄 하고 있었다.
2시가 되었다. 탄약고, 유류 보관소 등 교내 중요시설 등을 순찰해야 했다. 교정이 꽤 넓은 탓에 배정된 승용차를 이용했다. 밖은 더 추워졌다. 서둘러 차 문을 열자 냉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냉장고의 그것이었다.얼음 바닥이 된 운전석 위에서 웅크린 채 두 손으로 허벅지를 쓱쓱 비볐다. 키를 꽂아 돌리자 그렁그렁 불규칙한 기침을 토해냈다. 추위에 골병든 모양새였다. 액셀레이터 패달 위에 발바닥 힘이 더해지자 차량 내부는 훈훈해져 갔다.
아무도 없었다. 사람도. 그 흔한 자동차 불빛도. 언제 내렸는지 모를 눈이 탄약고 구석에서 흙과 버무려져 간혹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안고 있던탄약고 앞에서 GOP에서 북을 바라보며 밤을 새웠던 때를 생각했다. 손으로 두꺼운 열쇠뭉치를 쓸어보았다.초행 순찰이었던 탓인지 1시간을 꽉 채우고서야 돌아왔다.
당직실로 돌아오자 나갈 때완 다른 기운이감돌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수화기를 들고 있던 듯, 동료는꽤 진척된 대화를 하고있었다. 얼핏 들어보니 자살이 어떻고 신원이 어떻다는 둥 전형적인 미귀가자 신고내용이었다. 어라! 그렇지만 여기는 중앙경찰학교가 아니던가. 의아해하면서도 어느새 내 귀는 통화 소리에 다가가고 있었고 볼펜을 쥐고 있던 손은 이면지 위에서 끄적거리고 있었다.
현장 경찰은 치안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건의 발단은 어느 인터넷 1인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던 청취자가 자살을 암시하자이를 눈치챈 방송DJ가 112에 신고했던 것인데문제는 자살기도자가 경찰 교육생으로 추정된다는 것. 때문에 경찰대학과 인재개발원은 물론 이곳 중앙경찰학교까지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결국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휴...5시.
긴장이 풀려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지구댄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로 자리를 옮긴지이제 4주 차 아니던가.의자에 몸을 맡긴 채 이 시간 현장 속 나의 동료들을생각했다. 뻑뻑해진 눈을 버텨보려 잔뜩 찡그리고 있을 미간, 고래고래 내지르는 술 떡된 자의 욕설에 한숨 쉴 기력조차 방전되어 있을, 그러다가도 '딩동댕' 신고 소리에 굳어버린 목을 돌리며 순21호 핸들을 돌리고 있을 그들. 그들에게 미안함이 돈다. 이렇게 따뜻해도 되는 건가.. 내가 이 정도로 피곤해져도 되는 건가 하고...
"자연이 진공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권력도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현장 경찰은 치안공백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조금 편하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들이 뻑뻑해진 눈을 비비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들의 멱살이 잡히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내'가 오늘을 살고 희망찬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면 그들의 고된 오늘과 미래를 담보로 삼고 있기 때문이리라. '대한민국'은 현장 경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