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유롭고 정의로운 여자가 경찰이라

by polisopher

- 야! 이 새끼야. 이거 안 놔!

- 미친년이 뒈질라고!

- 야! 새꺄!


한 경찰의 머리채를 잡고 뒤 흔들던 놈의 입술에 순간 불꽃이 튀더니 고개가 뒤로 확 꺾였어. 이윽고 놈의 머리채를 두 손으로 움켜 쥔 경찰이 당기듯 낚아채니 놈의 얼굴이 바닥에 곤두박질쳤지. 피떡이 된 얼굴을 감싸고 데굴데굴 구르던 놈의 뒷목을 무릎으로 지긋이 짓누르던 경찰은 녀석의 두 손에 차르륵 수갑을 채웠어. 나냐고? 야! 나 그렇게 무식한 놈 아니거든. 알랑가 모르겄다. 신임 순경 박미선이라고.


박미선은 요새 신임 순경들이 다 그렇듯 경영학에 영문학을 복수 전공하고, 호주 어학연수에, 토익 900점에, 워드에, 태권도 합기도 검도에, 대형면허에, 캘리그래피에, G20 통역자원봉사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을 한 바퀴 돌고 입가심으로 일본과 동남아를 숱하게 오고 간 한마디로 못하는 거 별로 없고 못가 본 곳 별로 없는 열혈 여성이지.

모든 신임 경찰이 박 순경처럼 빠방 하지 않다고? 그건 그래. 하지만 스펙이나 경험들을 보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 사양을 장착했어. 80% 이상 대졸 출신에, 그 안에 석 박사, 공학사, 예술가, 무도인, 전직 사장님, 군 출신, 그 밖의 깊고 넓은 사회경험 등, 다양한 이력이 보석처럼 곳곳에 박혀 있어. 응시 연령 제한이 완화된 게 하나의 원인이겠지만 신임 경찰의 인적 스펙트럼이 무척 넓어졌지. 그건 그렇다 치고 박 순경이 경찰 하려고 저 많은 경험을 했을 리는 없었거야. 그래서 물었어.


- 야 너도 참 독종이다. 가만있으면 발바닥에 막 뭐가 돋아나기라도 하냐. 뭘렇게 빨빨거리며 살았어?

-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죠!


까불까불 도발적인 내 질문에 찬물을 확 끼얹는 것 같은 대답.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았다는 데 할 말 다했지 뭐. 아무튼 같은 톤으로 계속 물었어.

- 그래서 경찰도 여행 다니듯 와 본거냐?

-......

- 뭐냐? 그 눈빛은?


미선이 나를 지긋하게 쳐다보더라. 그렇다고 니들이 상상하는 그런 야릇한 눈빛은 아녔어.


- 여기서는 결혼했다고 눈치 밥 주고 그러지 않을 것 같아서. 또 열심히 한 만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실망스러운 대답이었어.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면 남극 횡단도 가능할 것 같던 친구가 눈치 밥 먹기 싫어서 경찰을 택했다는 게.


- 그래? 경찰 들어와 보니 생각한 대 로디?

- 확실히 민간 기업에 비해 직업적 안정성은 월등해요. 결혼했다고 눈치 볼 일도 없고 출산 휴가에, 유아휴직에 사실 여성 직장인에게 이런 시스템은 매력적이죠. 그런데......

- 그런데. 뭐?

- 내가 결혼만 생각해서 경찰을 택했겠어요? 이 일을 하면 뭔가 의미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근데 그게 간단하지 않으니......

- 의미나 보람이라...... 그건 확실히 놀러 다니며 느끼는 것과는 다르긴 하지.

- 씨...... 짜증 나.

- 뭐? 씨?

- 씨팔 좆도 모르면서.


박미선의 갑작스러운 씨팔 어택에 당황도 했지만 얘가 뭐가 있긴 있구나 싶더라.


- 씨팔? 내가 뭘 모르는데?

- 아 쏘리 쏘리.. 욱 해버렸네.

- 됐고. 뭔데?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 음...... 일전에 봉 순경님도 한 동안 앓은 적이 있댔잖아요. '나는 어떤 경찰인가?'하는 의문요. 혹시 불치병이 아닌가 할 정도로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 확실히 그랬지. 지금도 가지고 있긴 한데 이제는 불치병이라기보다는 만성질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친구처럼 다독이며 평생 함께 가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바심은 없어졌지...

- 그래서 가닥은 잡혔나요?

- 사실 예나 지금이나 원론적으로는 같어. 정의로운 경찰, 폼 나게 해보고 싶은 거. 그런데 조직에서는 너무 효율성만 중시해. 효율과 정의는 상극인데 말이야. 웃기잖냐. 정의를 추구한다는 조직이 정의를 추구하려는 경찰을 방해한다는 게 말이야.


말하는 내내 내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미선. 마저 마무리 지으라는 표정이었다.


- 나? 지금 어떠냐고?... 인상 쓰면서 정의를 수호하고 있는 뭐. 아직까진 정의로운 경찰. 그럼 넌 어떤 경찰인데?

- 정체성이 없어야 하는 경찰.

- 야.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지. 선문답?

- 이건 모든 경찰이 공통인 거 같은데, 우선 조직 안에서 각자의 소신은 좀 없어야 한다는 거. 또 하나는 나만 해당될 수 있는 거라.....


ᆞ적ᆞᆞ할...


- 뭐뭐? 성적 역할?


미선의 뜬금포에 놀랐다. 정체성 없어야 한다는 말은 조직의 생리가 파악됐다는 얘기로 들렸지만, 성적 역할이라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거리 더라니까. '성적 역할' '성적 역할' 얘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조마조마 해졌지.


- 여성이어야 하는지 여성이 아닌 척해야 하는지 모·르·겄·다·고.

- 야. 좀 이해하기 쉽게 말해라. 그러니까. 뭐야. 소신이 없어야 하는 말은 알겠어. 소신과 양심에 따라 주장하고 행동했다가 개 털리는 게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니... 두 번 째는 어렵게 경찰 됐는데 마초 문화 때문에 좆같다. 뭐 이거야?

- 오... 역시.

- 맞지? 그렇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실 직접 보고 듣고 깨달은 여자 경찰들의 고민거리는 남자 경찰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막판에 물줄기 하나가 삐져 흐를 뿐.


나를 포함 요새 젊은이들, 대개 경제적 안정 때문에 공직을 택해. 그중에서도 많이 선발하는 경찰은 더 매력적일 수밖에. 물론 경찰이 적성에 맞아 택했다는 사람도 보았지만 그건 자기기만인 거 같고...


암튼 좋아. 그걸 인정하더라도 일단 경찰이 되고 나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코부터 킁킁거려. 우리 그런 거 좋아하잖아. 고향은 어디고, 학교는 어디 나왔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 세평. 모든 인사가 세평으로 귀결돼. 뽑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거든. 나머지는 병풍.


누구는 뭐 때문에 안 됐다더라. 누구는 뭐 때때 됐다더라. 등등 조금만 지나 봐. 금방 알아. 그러니 뭐 좀 해보려는 애들은 뭘 해야 되겠냐? 그래 네트워크. 관계망 형성.

그리고 또 하나 강력한 소스가 계급이지. 자신성품과 능력이 부족하고 가능성이 희박하고 오지랖이 좁아도 이런 것들을 수십 배 뻥 튀기 해주는 게 계급 이걸랑. 결국 연줄 플러스 계급은 뿌리 깊은 상호관계를 맺고 있지.


만약 너라면 어떻게 할래?


여기까지는 모든 경찰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여자 경찰의 다른 물줄기는 바로. 결혼과 출산.

잘 봐. 여기 유능한 여자 수사관이 있어.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휴직을 해. 다시 수사관으로 복직을 했어. 제 자리로 돌아온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엄마 수사관이거든.


유능한 남자 수사관이 있어.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휴직을 해. 다시 수사관으로 복직을 했어. 제 자리로 돌아왔어. 아니 늘 그 자리에 있었어. 아빠 수사관이거든.


엄마 수사관에게 휴직은 의무고 필수야. 하지만 아빠 수사관의 휴직은 북유럽과는 달리 선택이지. 그러니까 말이다. 남자보다 더 독사 같고 호랑이 같고 여우 같은 여자 수사관이라도 최소한의 휴직 기간을 거치고 나면 엄마와 아내 아니 심지어 자연인이 되어서 컴백해. 아니 자연으로 돌아간 게 맞겠지?


맞벌이 수사관 중에 육아와 가사를 위해 남편이 휴직을 하는 케이스가 있을까? 참 웃겨. 같은 조건에서 여자 수사관이 자질이 월등히 높은 데도 사회는 여자에게 육아를 강요해. 여자는 휴직 기간이 3년이다. 남자는 1년이거든. 이게 무슨 말이야. 애는 여자가 키워라. 뭐 그런 거 아냐.


또, 여자는 엄마가 되면 변해. 자신 보다, 일 보다, 아이를 먼저 챙겨. 여기까지 그렇다 쳐. 심지어 남편을 더 챙겨. 웃기지 않냐? 이 말에 부정할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 나의 어머니, 이모들, 고모들, 친척 누이들, 지하철과 버스 그리고 마트와 길거리에서 본 모든 엄마들이 그렇데. 아냐? 그래서 자신의 꿈 내려놓고 대부분 평강공주로 남지.


그러니까. 여자 경찰관들은 심각해. 결혼을 언제 할 것인가. 꼭 해야 하는 것인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는데 나는, 내 꿈은, 내 일은, 어떻게 되는 건가? 박미선의 고민, ‘여성이어야 하는지 여성이 아닌 척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미는 뭐런 거지.


- 박 순경 너 말대로 경찰 조직은 마초 문화야.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성 중심의 군대 문화지. 그래서 군대식 각 잡기 놀이 싫어하는 나 같은 놈들도 꽤 되거든. 그래서 너 심정 조금은 이해된다.

- 뭔 소리? 봉 순경님은 남자잖아. 군사 문화가 싫더라도. 남자가 구축해놓은 성 안에 있으니 행동반경이 나 같은 사람보다야 넓지 않아?

- 아... 맞네...

- 여자 경찰은 여전히 남자 백 명 중, 열 명밖에 안 돼. 목소리도 색깔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여경의 날 같은 위화감 조성의 날이 생긴 거 아니겠어? 여자 경찰이 기념품은 아니잖아? 뭘 축하하고 기념하고 위로하겠다는 건지 원.


경찰 홍보 포스터 봐봐. 예쁜 경찰을 홍보에 이용하는 거 못 마땅해하면 이상한 건가? 아무튼 좋은 쪽으로 생각하더라도 현실은 여전히 ‘나는 경찰인가, 단지 경찰 옷 입은 여자인가’야.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뚜렷하고 자존감이 강할수록 획일화되고 전체주의적 성격이 짙은 사회나 조직에서 버티기 어렵다. 더군다나 미선은 남성 문화의 첨탑에 갇혀 있는 신세. 남자 경찰은 알 수 없는 원초적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셈인 거지. 자유롭고 정의로운 여자가 경찰이라...


- 그렇다면 셋 중 하나네. 소신껏 살기 5%, 박쥐처럼 살기 50%, 자신을 버리고 남처럼 살기 45%. 박 순경은 어느 쪽?

- 음......


어느 쪽이든 미선은 고뇌를 벗 삼지 않고는 살 수 없으리라. 소신껏 밀어붙이다가도 때론 박쥐의 날개 짓을 하겠지.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타인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스스로에 대한 혐오 때문에 잠수를 타거나, 술독에 빠져 지낼 거야.


남들이 보면 이상해 보일 수 있어. ‘왜 쟤는 별 거 아닌 거 가지고 피곤하게 사나.’하고. 그런데 이렇게 자학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 고통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면 나중에는 대개 문화의 아이콘이 되거나, 최소한 변화의 물꼬를 트더라. 그래서 말인데 나는 미선이 지 성깔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일 하고, 잘 하는 일 살리면서, 때로는 꼬라지도 막 부리면서 말이지. 그래 자신이 원하는 세상이 좀 더 가까워질 거 아냐.


- 자자자자. 됐고! 소주나 한 잔 빨러 갑시다. 터미널 출구 뒤쪽에 매운 닭갈비집 죽이는데 알거든요.




둘이서 소주 10병 까고, 입술 퉁퉁 붓도록 갈비 뜯는 동안 아까 그 이야기는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대장ᆞ과장ᆞ서장ᆞ청장 그리고 주취자 새끼들 욕만 실컷 했다. 역시 술자리에서 그들만한 최고의 안주감은 없는 것이다.


ㆍ대한민국 파출소 겨영찰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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