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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리작가 Jun 10. 2019

안경 낀 사람은 나 하나

엄마 수행 평가

이젠 나이 들어 이런저런 노인의 특징을 보이는 아빠

아빠 집에 가면 왜 그리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많은지 이사 갈 때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이것 좀 다 버리라고 해서 엄마 자존심을 상하게 한단다.

엽서라든지, 우표, 지폐 등 무언가 고상한 것들을 모으는 게 아니다.

일회용 숟가락, 나무젓가락, 아파트 분양 홍보용 물티슈, 행주 등등 종류도 참 다양하다.


노인 특유의 걱정으로 혹시 언제 필요할지 몰라 모아 두는 그 물건들이 우리 가족 도시락 싸서 소풍 가는 날 총출동을 한다. 그중에 색깔도 누렇게 변할 정도로 오래된 것들은 거절을 못해서 받을 뿐 사실 썩 반갑진 않다.

그래도 아빠의 온갖 잡동사니 중에 가장 구미에 당기는 것이 있는데 바로 '안경수건'

그날따라 안경수건이 없어 옷으로 대충대충 닦고 있는 걸 본 아빠가  그동안 모아둔  알록달록한 안경수건들을 모조리 푼다. 마치 방물장수 보따리 풀듯이.

그런데 요즘 안경수건, 모양도 색깔도 참 어찌나 다양하고 예쁜지 선물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안경 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안경은 내 몸의 일부인 듯 항상 썼다 벗었다, 수시로 안경알도 만져 하루에 몇 번씩 닦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집에도 서랍에 화장대에 책상에 여기저기 안경수건이 널려 있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도 안경을 쓴다. 좀 자주 닦았으면 좋겠는데 항상 뿌연 채로 쓰고 다닌다.

몇 번 닦아주며 '이러면 더 잘 보이지 않아?'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없다.


유난히 책 읽기를 좋아하는 딸아이는 1학년 여름방학부터 안경을 썼다.

나는 아이가 만 4세가 되고 몇 개월이 지나 한글을 가르쳤다.

아이는 언어감각이 좋았고 엄마와 한글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신나게 한글을 깨친 아이는 동화책을 마구 읽어대더니 이미 7살에 초등 3학년 베스트 도서를 읽는 수준이었다.

나는 아이가 매일 읽는 책 제목과 읽은 페이지를 프로그램에 입력했는데 전국에서 눈에 띄게 좋은 기록을 보였다. 욕심이 났다. 나는 매주 빠지지 않고 도서관에 갔다.

아이에게 좋은 책을 한 권 한 권 선별하였고 절판되어 구입조차 할 수 없는 책이 어디 도서관에 있다 하면 30km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책 끄는 카트가 2개나 부서졌을 정도이니 당시 나는 그 생활에 몰입하는 것을 넘어 약간 미쳐 있었던 것 같다.

아이는 내 자부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 많이 읽는 아이는 엄마에게 자부심이었지만 반면에 안경을 써야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아이가 1학년 1학기 내내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인다고 했지만 설마 안경을 써야 할 정도인지는 몰랐다.  

생애 처음 안경이라는 것을 쓰고 건물 간판들을 읽으면서 '와아~ 잘 보인다'하던 작은 아이.

'그런데 방학 끝나고 학교 가면 안경 낀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텐데' 걱정하던 아이.

착한 아이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작은 아이에게 미안했다.

엄마가 혹시 널 이용한 건 아닐까? 네가 좋아서 읽은 거 맞아?


어릴 적 나는 독서도 취미 없고 학교 공부도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중간고사에서 우연히 좋은 성적을 받으면서 슬슬 공부에 흥미를 느꼈고 중학교 때 폭발적으로 공부하면서 중2부터 안경을 썼다.

역시 책을 많이 보는 것은 눈 건강에 나쁘다.

그러니까 딸은 나보다 안경을 7년이나 먼저 썼고 안경을 한번 끼기 시작하면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시력은 나빠질 테니 엄마보다 7년의 시간만큼 더 나빠지겠네.

엄마가 성인이 되었을 때보다 그 긴 시간 동안 더 나빠지면 대체 얼마나 더 나빠진다는 소리야? 만화 속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 낀 고시생이 문득 떠오른다.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 작은 아이가 어느덧 커서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안경 처음 끼며 걱정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매일 안경은 굴러다니고 뿌연 채로 끼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한 이야기들을 신나서 떠드는 아이가 되었다.

방을 잘 정리하지 않는 아이는 엄마가 제 방에 들어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가 아직 자는 새벽에 살짝 들어가 본다.

정신없는 방에 여지없이 굴러다니는 안경


아이의 안경을 닦는다.

항상 동생에게 치이고 엄마 잔소리를 견디면서도 뭐든지 성실하고 열심히 해서 엄마가 들을 만한 칭찬보다 더 많은 칭찬을 듣게 해 주는 아이. 엄마의 자부심을 위해 어쩌면 희생되었을지도 모르는 아이.

아이가 평소 넉살이 좋은 것도 어쩌면 생존전략인지 모른다.

아이 성격이 새침하다면 매일 잔소리하는 엄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아이는 여섯 살이나 어린 귀염둥이 동생의 틈에서 엄마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넉살 좋아지기로 전략을 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에게 좀 침착하고 신중하라고 또 잔소리를 한다.


아이의 안경을 닦는다.

'후후' 입김 불어 정성 들여 닦는다.

뿌연 안경 깨끗해지듯 우리 딸 마음 생채기도 맑게 낫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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