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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점심 도시락 옆 페이지

수저 소리와 여백

by 김하종

전자레인지 앞에 줄이 짧다. 용기 뚜껑을 아주 조금만 젖혀 놓고 1:30을 눌렀다. 드르륵 돌아가는 접시 위로 김이 얇게 오른다. ‘삑’ 소리가 나자마자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만의 점심으로 흩어진다.



나는 종이냅킨을 한 장 더 챙긴다.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면, 사무실 공기는 전보다 조금 느려져 있다. 프린터의 간헐적인 기침, 메시지 알림의 미세한 진동. 그 사이에 나만의 여백을 하나 깔아 본다. 키보드를 살짝 밀어내고, 마우스패드를 오른쪽으로 치운다. 빈 자리 한 폭이 생긴다. 그 한 폭 옆에 책을 얇게 펼친다.



뚜껑을 벗기는 순간 작은 탄성이 난다. 김이 눈가를 스치고, 젓가락이 용기 가장자리를 ‘딱’ 하고 건드린다. 첫 숟갈을 입에 넣는 동안 첫 줄을 읽는다. 한 숟갈 사이, 한 문장이 들어앉는다. 급히 넘기지 않고, 혀끝에서 천천히 풀리게 둔다. 화면 너머의 대화는 파도처럼 왔다가 멀어진다. “오후 안건 공유됐대요.” “소회의실로 변경.” 말들이 머리 위로 지나가도 종이 위의 잉크는 가라앉는다.


점심의 책은 보통 아침보다 얇고, 밤보다 밝다. 햇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사각형을 만들어 책 가장자리에 걸릴 때, 문단의 시작과 끝이 자연히 도드라진다. 도시락 칸처럼,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낮은 벽이 있다. 그 벽이 서두르지 말라는 신호다. 밥을 삼키는 동안 단어 하나가 목 뒤로 조용히 넘어가고, 물을 마실 때 그 단어의 그림자가 어깨로 내려앉는다. 오후의 졸음을 대신 받아 주는 작은 무게. 그 무게만 있으면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는다.


젓가락 뒷부분으로 페이지 모서리를 살짝 눌러 표시를 남긴다. 포스트잇은 번거롭고, 형광펜은 과하다. 점심에는 가벼운 표식이 잘 어울린다. 냅킨을 반으로 접어 용기 밑에 깔아 두고, 남은 반쪽으로 입가의 양념을 닦는다. 그러고 나서 책의 여백에 점 하나를 찍는다. 오늘의 표시. 점은 작지만 방향을 바꾼다. 점 하나로 문장이 끝나고, 다음 줄이 시작된다. 오후도 그렇게 간다.


반쯤 먹었을 때 젓가락 끝이 용기 바닥을 살짝 긁는다. ‘짤칵.’ 그 소리가 페이지의 쉼표가 된다. 나는 눈을 들어 사무실을 한 번 훑는다. 회의실 쪽으로 누군가가 서류를 들고 급히 지나가고, 누군가는 의자에 기대어 하품을 삼킨다. 이 모든 움직임이 내 문단의 주변부에서 조용히 일어난다. 중심은 여기, 도시락과 책 사이 좁은 거리. 이 좁은 곳에서 오후를 버틸 힘이 나온다.


남은 반찬을 정리하고 종이컵에 커피를 따른다. 뚜껑의 작은 구멍에서 뜨거운 냄새가 올라온다. 커피의 씁쓸함과 방금 읽은 단어의 씁쓸함이 같은 톤으로 포개진다. 맛이 정리되면 말도 정리된다. 메일의 첫 문장을 떠올리기 직전, 페이지에서 문장 하나를 조용히 떼어 온다. “지금 필요한 건 길게가 아니라, 정확히.” 그 말이 오늘의 커서를 한 칸 앞으로 밀어 준다.



창가 쪽 자리에서 누군가 웃고, 복도 쪽에서는 택배 상자를 뜯는 소리가 난다. 나는 문단 끝에서 숨을 고르고 냅킨 모서리를 한 번 더 접는다. 흰 깃발처럼 서 있는 접힘이 작고 확실한 ‘여기까지’를 말해 준다. 끝내려는 말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표시. 점심의 ‘여기까지’는 유난히 다정하다. 짧게 시작된 것들은 끝도 부드럽게 온다.


가끔은 책이 아니라 사내 소식지의 에세이 한 꼭지, 길지 않은 시 한 편을 펼친다. 점심의 읽기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중요한 건 분량이 아니라 호흡이다. 딱 한 문단. 그만큼만 내 것으로 만들면 충분하다. 한 문단은 회사의 오후를 견딜 만큼의 길이다. 길 위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릴 때와 비슷한 길이.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도 않는 길이.


용기를 닫고 쓰레기를 정리한다. 냅킨에 남은 기름 동그라미가 구두점처럼 보인다. 그 작은 구두점을 바라보다가, 책의 여백에 점 하나를 더 찍는다. 오늘의 말을 정하듯 조용히 쓴다. ‘여백.’ 회의 안건 사이에, 말과 말 사이에, 시선과 시선 사이에 그 단어를 넓게 깔아 보려 한다. 말의 속도가 과속하지 않게, 생각의 방향이 급회전하지 않게.



회의를 다녀오면 접어 둔 모서리가 그대로 기다리고 있다. 모니터를 잠깐 끄고 책을 다시 펼친다. 낮은 볼륨의 사무실 소음 위로 문장이 조심히 지나간다. 오래 앉지 않아도 좋다. 두 줄이면 충분하고, 어떤 날은 한 줄이면 더 좋다. 한 숟갈 사이, 한 문장이 들어앉는다. 그 리듬만 잊지 않으면 오늘은 이미 절반쯤 정리된 셈이다.


퇴근 준비를 하며 책을 가방에 넣는다. 무게는 어제와 비슷하지만, 손끝의 감각은 분명 다르다. 도시락 옆에서 건너온 작은 증거가 책등에 남아 있다. 문이 열리면 다음 페이지로 자연스레 옮겨 탄다. 점심 도시락 옆에서 시작된 한 페이지가 오늘의 오후를 단단하게 묶어 준다.


내일도 같은 자리의 다른 얼굴로, 한 문단만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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