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히읗 Jan 24. 2024

글이 잘 안 써질 때 1. 물음표 살인마가 되어라

문예창작과 꼭 가야겠니? <10화>

누구나 다 그럴 때가 있다.


초등학생 때 매일 있던 일기 숙제에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수행평가 과제물로 나온 독후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마감이 코앞인 리포트를 쓰기 싫어서.


글을 써야 하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그저 멍하니 빈 종이(혹은 화면)를 멍하니 바라보던 적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글이 잘 안 써지는 순간은 온다. 이걸 처음에 인정하고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못쓰는 게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누구나 다 글을 쉽게 생각하는데 생각보다도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평생 글을 써왔던 우리 교수님조차도 짧은 칼럼을 쓸 때 고민을 하는데,

아직 살아온 시간과 경험이 반의 반도 안 되는 학생들은 어떻겠는가. 더 힘들지.


오늘은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글이 안 써질 때 해결하는 방법' 중에서도 

대다수의 학생에게 효과가 있었던 방법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입시 실기 날짜는 정해져 있고, 실기 종료 시간 또한 정해져 있다.

데드라인이 확실한 문예 입시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시간 내에 글을 완성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글제가 나온 순간부터 데드라인을 향해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글제를 본 학생들은 자신이 어떤 글을 쓸 수 있을지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많은 학생들이 어떤 글을 써야 할지를 몰라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가 미완성의 작품을 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문예창작과를 준비하는 학생들, 입시생에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돈을 버리는 것보다 더 사치스러운 행동이다. 실기(뿐만 아니라, 백일장이나 공모전에서도)는 시간 싸움이다. 

오늘 알려주는 방법은 누구나 할 수 있는(심지어 초등학생 글쓰기에서도 좋은 효과를 보였다) 아주 쉽고 단순한 방법이다. 


분명 대학원에서 글쓰기 교육을 전공했는데, 글쓰기와 연상법과 그 효과에 관련된 이론이 분명 있었는데, 그냥 내가 했던 방법대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학생일 때 선생님들이 이론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것 보다도 실기를 통해 몸으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으니까. 이론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방법을 '물음표 살인마'라고 가르친다. 

조금 과격한 네이밍인데, 학생들은 이런 것들을 좋아했다.


실기나 백일장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글제'가 나오고,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 모를 때다.

정해진 글제에 맞춰 글을 써야 하는데 무슨 내용을 써야 하는지 아예 안 떠오르는 것도 문제고, 누구나 다 쓸 법한 너무 흔한 내용이 떠오르는 것도 문제다. 


물음표 살인마 방법은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예시를 통해 설명하겠다.


'그가 밤을 샌 이유(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2009년 정시 실기 글제)'라는 글제가 나왔다.

글제가 나온 순간부터 우리는 글제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는 나랑 같은 수험생이고, 공부를 하느라 밤을 새웠나? 이건 너무 흔하지 않아?'


'흔하지 않은, 그러면서 내가 쓸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지?'


'그가 누구야? 사람이야? 사물이야? 동물이야?'

-오,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나 동물로 의인화를 해서 쓰면 색다른 느낌이 들겠다.

-그의 연령은 어느 정도가 되지?

-어린아이의 시선과 말투로 글을 쓰는 것과 노인의 시선과 말투로 쓰는 것은 차이가 있잖아?

-동물이나 사물이 '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라는 대명사는 무조건 남성화자가 되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남성이 되고 싶은 여성의 이야기도 '그'라고 써도 되는 건가?


'그는 왜 밤을 새운 거야? 고민이 있나?'

-고민이 있는 건 너무 흔하지 않나?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억지로 밤을 새운 건가? 자기 스스로 밤을 새운 건가?

-잠을 못 자는 불면증인가?

-밤을 새운다는 건 뭔가 부정적인 이미 지지 않아?

-그렇다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쓰는 학생들은 별로 없겠네?

-밤을 새운 이유가 긍정적인 느낌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복권 당첨이라도 되었나? 그러면 설레서 잠이 안 올 수도 있지?

-소풍이나 여행 전날에도 그렇잖아?

-설렘이나 긴장 말고도 잠을 안 자고 밤을 새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직업일 수도 있잖아? 밤에 일하는 직업이 무엇이 있지?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와 계속 질문과 질문을 주고받는다. 

물음표가 새로운 물음표를 만들어내고, 또 다른 물음표가 생기고.

연습장에 빼곡히 나의 의문들을 잔뜩 써내려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빈 종이는 내가 쓸 수 있는 소재들로 꽉 차게 된다.


그다음부터는 선별작업을 시작하면 된다. 

내가 쓰기 재밌는 '인물(개성적이거나 입체적이거나 구체적이면 좋다)'이 있고,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가 있고, 처음부터 결말까지 구성이 확실하게 되는 글을 쓸 수 있는 재료를 추려내는 것이다.


질문이 많이 나올수록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재가 많이 나오게 되고, 자연스럽게 재밌는 글이 완성되기 쉽다. 이 방법은 단어 글제, 문장 글제, 상황 글제 등 모든 글제에서 다 효과적이다. 한 번쯤은 이 방법을 혼자 해보길 바란다.


수업에 학생이 이상이 된다면 물음표를 이어가는 것을 혼자 필요 없이 다 같이 하면 된다.

이게 더 효과적이긴 하다. 타인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지점들이 등장하고, 글에 더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니까.


그렇지만 누구나 다 고등학교 문예창작과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학원을 다니기 힘든 사람들도 있다.

내가 만난 학생 중에서 문예창작과를 지원하는 같은 반 친구와 함께 공부를 하다가 배신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누군가에게 완성되지 않은 자신의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피하게 된다.

글을 쓰는 예술가 중에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누구나 다 알겠지만 시험장에는 나 혼자 들어가야 한다.

처음에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서 글을 쓰거나 성장시킬 수도 있지만, 결국은 나 혼자 해결해야 할 힘을 길러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버릇을 초반에 들여두면 시험장에서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글을 써나가는데 힘이 되기 마련이다.


글을 쓰기 위해 하는 생각, 글을 쓰는 방식, 글을 대하는 태도. 

이런 요소들을 나는 글을 쓰는 스타일이라 부른다.


글을 쓰는 스타일들은 모두 다르기에,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는 팁도 누군가에게는 잘 통하고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없을 때가 많다.


그렇기에 나는 이런 글을 쓸 때마다 학생들에게 '이 것이 정답이다'라면서 해결책을 주려 하기보다는 생각할 거리나 방법을 던져주면서 열린 결말로 끝내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내 성격과 글 쓰는 스타일 또한 내 글에 자연스레 드러나기에 이런 내 목적이 잘 안 나타날 수도 있다.)


언제나 난 내 글이 혼자 글을 쓰는 학생에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글을 쓴다.

오늘 글 또한 그러하길 바란다. 

이전 09화 장원과 낙방 그 사이에서 정신 차리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