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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넌 Sep 13. 2024

아마 그래서 오늘도 (2024)

평화

아마 그래서 오늘도 (2024)


  나의 평화는 어디로 떠났을까요. 혹여 내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머나먼 땅으로 떠난 것은 아닌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다시 되찾아 올 수 있을까요. 혹시, 혹시라도 이곳으로는 불만족스러웠던 평화가 대기층을 뚫고 올라가 은하수 너머로 멀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요. 혹시라도 그렇다면, 혹시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갈 수 없는 곳까지 멀어져 버린 것이라면.


 눈을 뜨니 여전히 캄캄한 방 안이었다. 얼마 전 기어코 병원에 다녀왔다. 잠을 잘 못 자서 왔어요. 얼마나 주무세요? 많이 자면 두어 시간 자는 것 같아요. 못 잘 때도 많고요.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동생의 저금통에서 돈을 얼마 꺼내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 놓고서, 동생이 돈이 없어진 것 같단 말을 할 때에 시치미를 떼던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불면증에는 다른 게 동반되는 경우가 많아요. 혹시 다른 증상은 없으신가요? 나는 주머니 안에 숨겨 놓은 동전 하나를 매만졌다. 매끈한 동전의 앞뒷면을 슥슥 쓸어본다. 혹시 조울증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오돌토돌하게 만져지는 날을 따라 손톱을 세워 긁어본다. 조울증이요? 네, 좀 의심이 되는데, 일단 잠을 못 주무시니 오늘은 수면에 도움을 주는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그리고 심리검사지를 드릴 건데, 다음 진료 때까지 해오시면 됩니다. 같이 한 번 살펴봐요. 동그란 것의 울퉁불퉁한 둘레를 따라 손가락이 몇 바퀴나 따라 돌았다.


 평화가 사실 뭔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것이 평화일까요. 무엇을 평화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마음이 들쑥날쑥 오르락내리락해요. 책장에 순서도 없이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키가 다른 책들을 따라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마음을, 줏대도 없이 대책도 없이 그런 것에도 흐트러지는 마음에도 평화가 들어올 수 있는 걸까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병원에서 준 심리검사지를 펼쳐본다. 예전에 해봤던 것과 같은 검사들이었다. 벌써 세 번째 같은 검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 마음을 미끄럼 태운다. 아냐, 나는 지금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이런 거에 무너지면 안 돼. 동전 하나를 책상과 손가락 사이에 두고 데굴데굴 굴려본다.


 나의 평화는 아무래도 나를 떠나 저기 먼 우주로 가버린 모양이지요. 동그란 약을 먹고서 조용해진 마음속에도 동전 하나가 데굴 굴러들어 와요. 그것 참 작고 작은 동그라미 하나면서, 그 작은 것에도 시끄러워진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시끄럽고 무거워진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지내고, 또 하루를 버티다가 그게 익숙해지는 때가 와요. 그럼 조용해졌다 착각을 하면서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동전 하나를 두려워해야 하죠. 줏대도 없고, 대책도 없이 흐트러질 마음을 아니까요. 그러니까 나에게는 평화가 가까이 올 수 없겠지요. 언제나 흐트러질 자리에 앉을 평화는 없는 것이겠지요.


 평평한 책상 위에 긴 톱니자국이 남는다. 남고, 남고, 남고, 남는다. 동전 하나가 돌고, 돌고, 돌고, 돈다. 남은 자국을 손끝으로 매만진다. 잔뜩 시끄럽고 무거운 손끝에 오돌토돌한 것이 새겨지고, 새겨지고, 새겨진다. 아마 그래서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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