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
겨울은 그래서 (2024)
눈이 왔다가 그 눈이 녹으며 빙판길이 생기고, 그 위에 다시 눈이 싸이길 몇 번인가 반복하고 나서야 겨울이 끝이 났다. 한동안 겨울에도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지난겨울은 집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절반 이상이었다. 날도 춥고, 길도 미끄럽고, 괜히 혼자 산책을 나갔다가 두 번인가 넘어진 뒤로는 더욱 집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어차피 나가봐야 춥고 시린 계절이다. 집 밖은 위험해, 이불속이 최고야. 혼자 추운 바람을 맞고, 몰아치는 눈발을 이겨내는 것은 너무 처량하고 외롭다. 그런 겨울이 끝나고 이제 봄이 되었으니, 아낌없이 봄을 위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나와 같이 쓸쓸했을 나무들을 위로하고, 나무를 물들이는 꽃들에게 품을 내주어야 한다. 그것들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보다 태연하고, 보다 곧으며, 보다 빛나는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봄의 바람 위로 꽃향기가 넘어올 때는 그것에 어울리게 웃을 수 있어야 하며, 꽃향기가 떠난 곳에 봄의 따스함이 머무르게 될 때에는 그것을 안락하게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봄맞이를 위해 두터운 이불을 걷어 세탁기에 넣고, 방청소를 시작했다. 구석에 박혀 있던 먼지들을 쓸어내면서 겨울 내내 달고 살았던 기침을 다시 해야만 했다. 케케묵은 물건들 사이에서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 혹은 그 케케묵는 시간 동안 사용한 기억도 나지 않는 쓸데없는 것들을 골라서 바구니에 담았다. 괜히 방만 어수선하게 만드는 것들을 봄을 위해 버릴 참이었다. 봄은 그런 점에서 참 좋다. 케케묵은 것이 떠내려가고 가벼운 마음으로 뭔가를 시작하게 될 것만 같다. 봄을 위해서라면야, 하면서 힘을 내서 방까지 청소하게 만든다. 이 참에 나도, 하면서 혼자서는 기운이 나지 않았던 일들을 봄의 기운을 빌려 해내게 된다.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봄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이겠다.
그러다 그것이 나왔다. 책상과 그 옆에 있던 서랍장의 사이 틈에서 불현듯 튀어나왔다. 꾸깃한 종이일 뿐인 그것은 평소의 나 같으면 받아오지도 않았을 영수증 한 장이었다. 양손으로 종이 끝을 잡고 적당한 힘을 주어 펼쳐보았다. 오코노미야키, 스키야키, 맥주 두 잔, 소주 두 병, 그리고 몇 년 전의 겨울이 적혀 있었다.
찬 바람을 맞으면서 헤매다가 들어갔다. 따듯한 공기, 그리고 그만큼 따듯한 색의 조명을 쓴 가게였다. 아직 때가 아니어서 그런지 가게 안은 한적했지만 빈자리 사이를 조명이 가득 채우고 있어 겨울의 찬 바람 따위가 들어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와 그는 안내해 준 자리 몇 군데 중에 가장 끄트머리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날따라 바람이 매서웠고, 우리는 얼굴이 벌겋게 식어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 매달리듯 그를 끌어안고 다녔음에도 채 맞물리지 못했던 우리의 빈 곳에 찬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온몸이 시리고 기운이 없었다. 주문한 음식과 술들이 나왔다. 눈 안에 따스한 조명과 술에 달아오른 그의 벌건 얼굴을 담아놓고, 뱃속은 든든히 채우고, 손끝이 자꾸 식는 그의 손을 주머니 안에서 꼼지락꼼지락 매만지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우리는 그 겨울, 그다음 겨울에도 몸을 데울 따듯한 곳이 필요할 때마다 그곳을 찾았다. 우리는 늘 같은 메뉴를 시켰다. 그러면서 종종 겨울바람으로 마음까지 차게 식은 것을 소주잔 같은 데에 털어놓고, 잔을 서로 부딪혀 마시면서 뜨거운 술로 마음을 다시 데우곤 했다. 오코노미야키, 스키야키, 맥주 두 잔, 소주 두 병, 너무 추웠던 그 겨울. 너무 추운 그 겨울이라서 우리는 오코노미야키를 더 맛있게 먹고, 뜨거운 스키야키에 더 기대고, 맥주 두 잔과 소주 두 병으로 차가운 마음을 털어 마실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이 영수증 한 장만이 그곳과 나를 이어주는 마지막이 되었다. 우리는 이 종이 안에서도 늘 그랬듯이 오코노미야키, 스키야키, 맥주 두 잔, 소주 두 병을 먹었다. 다만, 그날은 어찌나 추웠던지 시린 몸을 녹이느라 바쁜 탓에 술잔에도 차게 식은 마음을 담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소주 한 병이 거의 그대로 남은 채로 가게에서 나왔다. 뜨듯하게 데워진 몸에 차가운 마음을 그대로 안은 채 집으로 가는 길, 휘청거리면서 잡은 그의 손이 겨울바람에 시달려 퍼렇게 식고 있는 줄도 몰랐다. 너무도 마음이 차가워서.
손가락 끝으로 영수증의 흐릿한 글자들을 한 줄씩 따라 읽어본다. 케케묵은 종이 한 장을 괜히 손으로 매만져본다. 방금까지 속눈썹을 흔들던 많은 겨울바람이 손가락을 따라 종이에 새겨진다. 마지막으로 종이의 모서리를 한 번 문질러 곧게 펼쳐서 한쪽에 세워둔 쓰레기봉투 속에 살포시 넣었다. 겨울이 끝났다.
겨울이 끝났으니, 두터운 이불 대신 조금은 가벼운 이불을 꺼내 침대에 올려놓고, 쓸데없는 것들을 모아 버렸다. 지나갈 겨울을 위해 끌어안고 있던 무거운 것들을 한 꺼풀 내려놓는다. 겨울은 그런 점에서 좋다, 무거운 것들을 가져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