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질투, 권력, 폭력
애꿎은 뺨에게도 (2024)
아빠, 나는 아직도 나보다 민회가 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곤 해.
오랜만에 딸의 전화가 왔다. 오전에 한창 정신없이 현장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시간이 나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서 마무리할 업무가 있어서 막 들어온 참이었다. 마침 배가 불러서인지 좀 나른해지려던 때라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대뜸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아직도 나보다 민회가 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곤 해. 나는 당황스러워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왜?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니, 그것보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10년도 더 된 어느 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13
안방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을 때였다. 거실 너머에서 희미하게 짝,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엄마아!
곧이어 둘째가 왼뺨을 부여잡고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아내가 놀라서 애를 부둥켜 안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언니가 자기를 때렸다고 했다. 뺨을? 응, 언니가 뺨을 갑자기 때렸어. 둘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듣고 나도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화장실 문 앞에 의기양양하게 서있는 첫째가 눈에 들어왔다.
언니가 그냥 갑자기 때렸다니까, 화장실 가려고 하는데.
김민주! 이리 와봐!
아내의 호통에도 첫째는 눈 하나 꿈쩍 않고, 주먹을 꽉 쥔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민주야, 엄마가 부르시네.
조금 타이르듯 말을 꺼냈다. 아이의 눈동자에서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뭔가가 보여서였다. 내가 그녀석의 눈동자에서 읽은 것은 원망 같은 것이었지만, 그게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들끼리 싸워놓고 왜 나를 저런 표정으로 보는 건지. 둘째는 엄마의 곁에서 조용히 뭔가를 계속 얘기하고 있었고, 아내가 다시 한 번 호통을 쳤다. 아내의 불호령에 나도 놀라서 잠시 안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아이를 바라봤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흐트러짐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요즘 첫째가 자꾸 이런 식이다. 올해 고3이 된 후로, 그리고 둘째가 근처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평화롭던 집에 불쑥불쑥 트러블이 생기고 있다. 그 대부분은 첫째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하던 녀석이, 정말 안 그러던 녀석이 어느날부터 자꾸 동생을 괴롭히고, 못 살게 굴었다. 어렸을 때는 둘이 작은 테이블을 하나 펴놓고 앉아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놀고, 어딘가 나갈 때도 꼭 저들끼리 손을 잡고 붙어다니더만, 이젠 같이 노는 것은 커녕 마주쳤다 하면 싸움이 났다. 그럴 때마다 혼이 나는 건 첫째였다. 아무렴, 첫째가 늘 붙어서 시비를 거니 혼나는 것도 그애의 몫이 되는 것이다. 근래에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동생의 뺨을 때리다니.
민주, 왜 뺨을 때렸어?
기어오르니까.
아이의 말에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놀란 건가, 답답함일까, 모르겠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하고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 있는데, 점점 눈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금방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다시 한 번 애엄마가 아이를 부르고, 그렁그렁한 눈이 내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눈물을 한방울 똑 흘리고 갔다. 내 발 오른쪽 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한 번 쳐다본다. 왜 저러는 걸까. 사춘기라 그런 걸까. 사춘기는 어렵다.
-17
예고 가고 싶어. 엄마. 아빠아. 예고 보내줘.
안 된다고.
민주가 엉엉 울면서 나와 아내의 팔을 번갈아 잡아보면서 매달렸다. 역시 그림을 시켜주는 게 아니었다. 예고가 웬말이야. 처음부터 발을 들이게 하면 안 됐던 거다. 멀찍이서 둘째가 방 안을 스윽 보다가 다시 스윽 사라졌다. 애엄마가 딸애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예고는 무슨 예고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22
요즘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에 푹 빠져 있다. 그쪽으로 진로를 삼겠다고 하면 좀 곤란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둘이 즐겁게 하던 일이니 시켜나 보자고 애엄마가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방과후 수업을 등록했다. 이번해에 ’수채화부‘ 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개설된 수업이었다. 아이들은 수채화 수업이 있는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각자 스케치북을 하나씩 펼쳐 들고서 그날 그린 그림들을 자랑하듯이 보여줬다.
민회는 잘 그렸네. 어디서 그렸다고? 어엉, 놀이터~. 예쁘다, 색칠도 잘 했고.
둘째가 신이 났는지 발바닥을 들썩거리는 게 눈이 보였다. 말도 자꾸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어, 놀이터에서~ 선생님도 잘 그렸다고 칭찬해 주셨다! 나무 그리는 게 좀 어려웠는데~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민주 그림은 좀 아쉽다. 스케치 잘 했는데, 너는 색칠을 하면 자꾸 망쳐 버리네.
민주는 조용히 엄마를 보고 있었다. 그리곤 자기보다 아직 꼬마인 동생을 스윽 내려다본다. 민주의 발바닥이 바닥에 척 달라붙어 있었다.
+1
어제 첫째가 그런 말을 했다. 아빠, 나는 아직도 나보다 민회가 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곤 해. 나는 끝내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대신 첫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발 걸어 넘어뜨리고, 뺨을 때리고, 괴롭히고, 못 살게 굴면 엄마, 아빠가 나를 봐줄 줄 알았어.
나는 바보였나봐. 아무래도. 그럴수록 엄마, 아빠는 나를 더 미워했는데.
이겼다고 생각하곤 했어. 봐라. 니가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려도, 내가 위야. 봐라. 니 위치를. 너는 나한테 뺨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근데 아빠. 나는 여전히 나보다 민회가 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곤 해. 민회 그림을 보면 자꾸 주눅이 들어.
+1
아빠는 끝끝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 눈치였다. 나는 그냥 내가 하고싶은 말을 줄줄이 꺼내놓다가 고마워, 들어줘서,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동생의 그림이 전시장의 벽면을 꽉 채우고 있다. 민회는 나에게 뺨을 맞고도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뺨을 때리는 사람이었는데 벽을 채우고 있는 커다란 그림 밑에 조그맣게 쪼그려 앉았다. 내세울 게 뺨 때리기나 됐던 사람이라 그런지, 그림은 뺨이 없으므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1
미안해, 민회야. 애꿎은 뺨에게도. 괜히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