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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넌 Sep 20. 2024

나는 나무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지만 (2024)

바람

나는 나무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지만 (2024)


 바람은 사실 언제나 분다. 바람은 사실 언제나 불고 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사실 언제나 바람을 맞고 있다. 언제나 부는 바람을 두고 나는 왜 바람이 부나, 왜 나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나, 바람과 나를 질책한다. 바람은 원래 언제나 부는 것인데.


 병원에 다녀온 지 3주가 또 지나버려, 다시 병원에 가는 날이 되었다. 집에서 병원까지 가는 길은 15분 남짓 걸리는데 오늘은 왠지 발걸음이 급했다. 힘들었던 지난 3주를 빨리 털어버리고 싶었다. 빨리 가서 줄였던 약을 다시 늘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너무 힘들었어요, 라는 말을 어서 해버리고 싶었다. 그 3주 사이에 병원 가는 길이 조금은 덜 뜨거워졌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서 힘들었던 길이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고, 덕분에 더 빨리 걸을 수 있었다. 2시 예약에 맞춰 집에서 나왔지만, 예약 시간보다 10분 정도 빨리 도착해서 병원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나를 언제 부를지 몰라 이어폰을 한 쪽만 끼우고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민주님, 진료실 들어가실게요. 간호사가 열어주는 문을 슬쩍 밀면서 진료실로 들어간다. 3주만에 보는 의사선생님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건넨다. 잘 지내셨어요? 나는 어, 어, 하다가 네에, 하고 대답했다.


 바람은 오늘도 사실 불고 있었다. 뜨거웠던 여름의 보도블럭 위에서도 바람은 있었다. 봄일 적에는 살살 돌아다니면서 이파리를 건드리다가, 여름을 만나면서 뜨거운 바람이 되어 나뭇잎 사이를 나돌았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걷는 길 위에도 늘 바람이 있었다. 아마도 언제나. 나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미미한 바람일지언정 바람은 계속 곁을 흐르고 있었다. 나는 때로 그 바람을 느꼈지만, 어느때에는 전혀 바람을 느끼지 못하곤 했다. 바람을 느끼지 않은 순간들에는 바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실은 바람은 늘 불고 있었는데.


 이 바람이 저를 어디까지 끌고 갈지 무서운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인데 자꾸 겁을 먹어서 더 힘들었어요. 예전에, 병원에 처음 오기 전에 정말 많이 힘들었는데요. 안 그러려고 하면서도,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깊숙한 곳까지 끌려갔었어요. 내가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바람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가 이겨냈으니 나에게는 또 이겨낼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생각과, 한 번 그랬었으니 또 그럴 수도 있는 나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그러지 않으려고, 나를 믿으려고 하면서도 내가 또 무너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피할 수 없는 바람을 맞아 흘러들어오는 것처럼요.


 바람은 어제도 불었을 것이고, 엊그제도 불었을 것이며, 그 전날에도, 그 전전날에도 언제나 불었을 것이다. 나는 봄에도 바람을 만났고, 겨울에도 바람을 맞았고, 가을에도, 여름에도 바람과 함께 했을 터인데 나는 이번 여름에 부는 바람에 자꾸 흔들렸다. 바람이 부네. 뜨거운 바람이. 왜? 자꾸. 자꾸. 자꾸 흔들리는 나와 자꾸 흔드는 바람을 탓한다. 왜 이러는 거야. 왜 자꾸 흔드는 거야. 나는 왜 자꾸 흔들리는 거야. 그러나 바람은 원래 불고 있었고, 바람이 불면 원래 무엇은 나부끼기 마련이다. 바람은 사실 늘 불고 있었고, 나뭇잎은 사실 늘 흔들리고 있었는데, 나는 나뭇잎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니 이래선 안된다고 나를 타박했다. 바람은 사실 언제나 불고, 그런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기 마련이며, 나는 그런 것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곤 했는데도.


 병원에서 나와 횡단보도에 서서 건너편에 서있는 나무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지 나뭇잎이 흔들렸다. 곧이어 나도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 하나에 나와 나뭇잎이 함께 흔들린다. 바람이 불어서.


 바람은 사실 언제나 불었다. 바람은 사실 언제나 불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사실 언제나 바람을 맞고 있었다. 언제나 부는 바람이니, 나는 언제나 나부끼게 된다. 나는 나무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지만, 바람이 불면 나부끼기 마련이다. 언제나 바람이 불고, 나는 언제나 나부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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