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튼
사랑은 버튼을 타고 (2024)
우리는 늘 그랫듯이 오늘도 같은 버스에 올라탔다. 그 사람은 어느날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났는데, 언제부턴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내가 알아채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같은 버스를 탔지 싶다. 그 사람의 존재를 알아채게 된 것은 사람이 꽉꽉 들어찬 버스 안에서 희미하게 퍼지는 향기를 맡았을 때였다. 뿌연 머스크향 사이에 이름은 모를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버스의 퀘퀘한 에어컨 냄새와 내가 뿌리고 나온 향수의 냄새 사이로 정체 모를 향이 나를 잡아끌고 있는 게 느껴졌다. 킁킁대는 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진 않아서 남모르게 숨을 계속 들이 마시고 있을 때, 내 앞에 서있던 그 사람이 하차벨을 눌렀다. 그사람이 기우뚱 하면서 벨을 누르면서 내가 찾던 향기가 그 사람에게서 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고보니 왠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처음엔 어디서 본 얼굴인가 싶었는데, 며칠인가 더 지나면서 그 사람이 매일 나와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이 되면 그 사람은 나보다 두어 정거장 뒤에서 올라탔고, 저녁이 되면 나보다 두어 정거장 먼저 내렸다. 직장이 아무래도 가까운 모양인지 아침엔 같은 정거장에서 내리고, 저녁엔 같은 정거장에서 탔다. 내가 그 사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버스를 탈 때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꽃향기가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그 향기가 좋았다. 이름 모를 그 향이 콧속 깊숙하게 들어와 뱅글뱅글 돌면서 감은 눈 위로 올라갔다가 머릿속을 휘젓는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여지없이 그 사람을 찾아 보고 있었다. 자꾸 그 사람을 보게 되면서 늘 멀끔한 옷차림이나 항상 깨끗한 신발이라든지, 각이 잡힌 가죽 가방 같은 것, 그러면서도 덜 말리고 나온건지 아직 끝자락이 젖어 있는 머리칼 같은 게 좋아졌다. 그 사람이 벨을 누르려고 팔을 뻗으면 나는 그 사람의 흰 손을 바라봤다. 늘 가지런히 정리 되어 있는 손톱 끝과, 거기서 이어지는 길죽한 손가락을 본다. 그 흰 손끝으로 살포시 눌리는 작고 빨간 버튼에, 나는 그 사람이 내리고도 한동안 눈을 붙이고 있곤 한다. 저 버튼에도 저 사람의 향기가 묻어 있을까.
오늘도 같은 버스에 올라탄 우리는, 붉게 물든 하늘과 그것에 또 물이 들어 반짝이는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의자에 앉게 된 내 앞에 그 사람이 섰다. 가까워지니 향이 더 짙게 났다. 나는 머릿속을 휘휘 걸어다니는 향기를 또 눈을 감고 느끼고 있다가, 버스가 기우뚱하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강을 건너 좌회전을 하고나면 그 사람이 내린다. 그 사람을 올려다보기엔 그 사람이 너무 코앞에 있어서 오늘은 멍하니 그 사람의 신발을 보고 있었다. 이어폰 너머로 그 사람이 내릴 정거장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나는 무심코 팔을 올려 아직 그 사람의 향기가 묻지 못한 작고 빨간 버튼을 슬쩍 눌렀다. 그리고 이어서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사람의 흰 손이 내 어깨 위에 있었다. 그 사람의 손목에서 나온 향기가 뱅뱅 돌아 코에 들어찬다. 놀라서 이어폰 한 쪽을 빼고 얼굴을 보니 슬며시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오늘 왜 여기서 내리세요?
네?
우리는 늘 그랬듯이 오늘도 같은 버스에 올라탔다. 어깨에 슬쩍 기대어 작고 빨간 버튼을 바라본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함께 손을 뻗어 그 버튼을 눌러본다. 버튼에 그 사람의 향이 묻고, 포개어진 내 손끝에도 그 사람의 향이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