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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넌 Oct 04. 2024

나도 원래부터 그러진 않았다 (2024)

나도 원래부터 그러진 않았다

나도 원래부터 그러진 않았다 (2024)


 이 레몬 나무는 내가 아는 한, 처음부터 레몬 나무였다. 엄마가 이모를 통해 반찬을 보내왔다. 청주에서 7시에 출발했다고 전화가 온 뒤로 2시간 30여분이 지나 집앞에 이모가 도착했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보니 짐이 한 가득이었다. 커다란 장바구니에 김치며 엄마의 반찬이며 냉동 만두 같은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모에게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하는데, 눈 앞으로 화분 하나가 다가왔다. 잠시 당황하며 무엇인지 여쭤보니, 이모가 레몬 씨앗을 심어서 자란 레몬 나무라고 했다.


 그것은 내 방 창틀 위에 놓여졌다. 레몬 나무는 이미 목질화가 되어 뿌리에서 이어져 나온 줄기가 단단해져 있었고, 이미 가지치기가 되어 온 터라 옆으로 넓어지면서 줄기가 자라나 있었다. 그 탓인지 충분히 이미 하나의 작은 나무로 보였다. 나는 레몬 나무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간간이 물을 주면서 뻗어나온 또 다른 줄기나 잎사귀같은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무섭게 자랐다. 볼 때마다 레몬 나무가 자라 있었다. 나중에는 새로 자라난 줄기를 찾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고, 그 정도가 되니 나는 그것의 처음 모습을 기억하기가 힘들어졌다. 애당초 레몬 나무였는걸, 하면서.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추석을 앞두고 이모가 연락도 없이 문을 두드렸다. 청주에 내려가기 전에 들렀다며 전과 송편, 고기 같은 것을 잔뜩 들고 있었다. 잠깐 들어오셔서 쉬다 가시라 하니 화장실만 잠깐 쓰겠다며 들어왔다. 화장실을 다녀온 이모가 레몬은 잘 크고 있어? 하고 물어온다. 나는 창틀 위에 놓여 있던 화분을 번쩍 들고 나갔다. 네, 잘 살아있어요. 어머, 레몬이 많이 자랐네. 그래요? 계속 이랬던 것 같은데. 엄청 많이 컸는데? 그래요? 응, 처음엔 요만했잖아. 그랬어요? 응. 


 내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계속 이런 레몬 나무였다. 계속 이렇게 풍성한 잎과 이미 단단해진 뿌리와 줄기를 가진 그런 레몬 나무였다. 나에게 올 때부터 레몬 나무였던 레몬 나무였다.


 그러나 이모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사실 아주 자그만 씨앗이었다. 그것도 레몬을 손질하며 빠져나온 생생한 씨앗이었다. 조금도 레몬 나무이지 못 했던 그것은 뿌리를 내리고 화분으로 옮겨지고, 물을 먹고, 영양분을 먹으면서 싹이 되었다가, 줄기가 자라 나오고, 잎사귀를 틔웠다. 내가 원래 레몬 나무라고 생각했던 이것은 이모에게는 원래 아주 작은 씨앗이었다.


 씨앗이었잖아.


 이모의 말을 듣고 나는 씨앗이었을 레몬 나무를 상상해본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내내 레몬 나무였다. 상상 속의 씨앗은 없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씨앗일 뿐.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계속 이런 레몬 나무였다. 그러나 이모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아주 작은 씨앗이었단다. 그러나 나에게는 역시 이것은 계속 이런 레몬 나무다. 이모에겐 계속 아주 작은 씨앗이 자란 레몬나무인 것처럼, 나에게는 줄곧 레몬 나무였으니까. 이모와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이모가 문득 시계를 보더니 서둘러 떠났다. 더 지체되면 차가 막힐 거라면서. 나는 실랑이를 하면서 내내 들고 있었던 묵직한 레몬 나무 화분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레몬 나무. 레몬 씨앗. 레몬. 레몬.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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