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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불 (2025)

소화

by 김민주

그녀의 불 (2025)


나는 그녀의 불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불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것은 미처 꺼지지 못한 작은 불씨 같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불을 발견한 이가 소화기를 치켜들고 뿌려댄 자리에 남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한 톨의 불씨였다. 미처 꺼지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다. ‘미처’ 꺼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소화기를 거둔 자리에 그녀가 남아 부채질을 해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녀는 나를 앞에 앉혀놓고, 툭, 불을 뱉곤 했다. 스스로 끄지 못했거나 간직하고 있던 불을 투욱. 나는 그것이 먼저 닿은 손등 같은 것이 뜨거워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그것을 뱉은 그녀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얼마나 뜨거웠으면, 나한테 불을 뱉었을까. 실제로 그녀는 그런 말을 한다. 내가 너 아니면 누구한테 이런 말을 하겠니. 그 말을 듣고 나는 겁에 질렸다. 내가 아니면, 내가 이 뜨거운 불을 삼키지 못하면 저 사람이 불타 죽는 것 아닐까.


손등에 슬며시 번져가는 불씨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그게 다시 그녀에게 옮겨 붙을까 봐 입을 벌려 손등에 갖다 댄다. 와앙, 하고 불을 먹는다. 불은 입안을 뜨겁게 달구었다. 삼켜 버리면 조금 식지 않을까. 혀 위에서 구르던 불을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눌러 삼켜본다. 식도를 타고 불이 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불이 내려가는 길을 매만져 보면서, 여기에 내 목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은 구르고, 목구멍을 태우면서 점점 크기를 키운다. 이윽고 위장에 내려온 불은 위벽에 닿는 것과 동시에 활활 타오르게 된다. 위가 다 탈 때까지 꼬박 30년이 걸린다.


그리고 나는 뱃속을 채운 잿더미를 보고서야, 내 위가 다 타버렸다는 것을 알아챈다. 내 뱃속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되었을까. 삼키고 삼켜도 삼키려 해도 결국 역류하여 뱉어낸 토사물을 보고서야 위가 타서 사라져 버렸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건 검게 타버린 위장이었고, 녹아버린 식도였다. 내가 삼킨 아주 작은 불씨로부터 나는 무엇도 삼킬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빈 속에도 그녀는 툭툭 불을 뱉어 넣고 나는 와앙 불을 집어삼키고. 화병 걸릴 것 같아서 그래. 이런 걸 누구한테 말하겠니. 내가 너 아니면. 나는 이미 속이 비어서 이것을 소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 저 사람이 타 죽지만 않게 하자. 빈 속에도 자꾸 재가 쌓인다.


내가 타고 녹고 사라져 가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이 타고 녹고 사라질까 봐 나한테 불을 뱉은 사람. 나는 이제야 조금씩 불을 내려놓는 방법을 알게 된다. 녹은 위장의 자리에 탄탄하고 억센 위벽이 붙는다. 나는 그녀의 불을 미워하지도 않고, 그녀의 불을 안쓰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불이 그녀의 위장을 태울지라도 그 자리에 새로운 위장이 생길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것마저도 그녀가 겪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이런 얘기를 하겠니.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언젠가 선물 받은 가정용 소화기를 조용히 집어 들었다. 그리고 불꽃이 튀는 전화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선 소화기로 내려 찍는다. 불은 사방으로 튀다가 태울 것을 찾지 못하여 얌전히 시든다. 부서진 전화기의 파편들을 손으로 괜히 토닥거려 보다가 한 번에 쓰레기통 속으로 쓸어 버린다. 불은 더 이상 타지 않고, 미처 잿더미도 만들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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